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를 회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대사들로서 우리의 부르심은 그분을 진실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찬란한 영광 가운데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보여 주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세상은 아름다움을 갈망하고 있다. 신시아 펄 모스(Cynthia Pearl Maus)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은 인간 삶의 자원 가운데 하나이며, 기독교는 마땅히 그것을 자신의 정신으로 채우고 자신의 것으로 주장해야 한다. 예술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러한 본능적 사랑에 호소하며, 그 결과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이 형식을 통해 담겨 있는 진리에 대해 더 넓은 청중의 귀를 얻게 된다."
다음은 우리 각자가 선함과 진리와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들이다.
자신의 생각을 점검하라
먼저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의 전제부터 살펴보라. 우리 대부분은 아름다움이 하나님의 본성에 뿌리를 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실재가 아니라,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흔한 또 다른 가정은 아름다움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며 복음 선포와도 무관하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고 거짓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옳고 덕스러운 일을 해야 하며 죄악되고 부도덕하며 불의한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우리가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기뻐하며 추한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사실 역시 앞의 두 가지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만일 이러한 잘못된 가정들이 당신의 생각을 설명한다면, 회개가 첫걸음이다. 앞 장들에서 말했듯이 회개는 문자 그대로 "마음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라.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라(고후 10:5).
아름다움은 진리나 선함, 도덕적 완전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질에 중심적인 요소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 아름다움을 선택 사항으로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하게 잘못된 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결함이 있다면, 세상 속에서 그분을 증거하는 우리의 증언도 결함이 있을 것이다. 사실 아름다움은 오늘날 이 세대에서 가장 강력하고 전략적인 복음 증거 수단일 수 있다.
일상 속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이 도덕적 필수 요소라면, 우리는 어떻게 삶 속에 더 많은 아름다움을 가져올 수 있을까?
다음은 몇 가지 간단한 제안들이다.
개인 공간에 질서와 아름다움을 가져오라
아름다움은 청결과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 조던 피터슨은 젊은이들에게 삶에 질서를 세우려면 먼저 "침대를 정리하라"고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조언은 아름다움에도 적용된다. 아파트나 침실, 집과 같은 개인 공간에 아름다움을 창조하라. 먼저 정리정돈부터 시작하라.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옷을 걸어 놓고, 청소하며, 공간을 질서 있게 만들라. 이것을 습관으로 만들고 일상의 일부로 삼으라.
야외 공간을 아름답게 하라
마당이나 정원이 잡초로 뒤덮여 있거나 가지치기가 필요한 식물들로 어수선하지 않은가? 적은 비용으로 조경을 하여 공간에 아름다움을 더할 수 있는가? 아무리 작은 공간이라도 아름다운 장소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라.
자신의 몸을 돌보라
좋은 위생 습관을 가지고 있는가? 자신의 몸을 잘 관리하고 있는가? 어떤 부분을 개선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면뿐 아니라 내면에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은 사도 베드로가 말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기르고 있는가? 그것은 온유함과 겸손함, 그리고 가족과 친구, 이웃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영이다.
꽃을 심고 아름다움을 드러내라
대로우(Darrow)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스위스에서 살면서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창문마다 놓인 꽃상자를 통해 아름다움을 기념하는 문화이다."
소박한 농가라 할지라도 봄이 되면 창문마다 꽃들이 만발한다. 이것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꽃들은 먹을 수도 없다. 그저 아름답기 때문이다. 우리 삶과 공동체에는 이러한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다.

삶의 작은 공간에 아름다움을 심으라
래리 워드(Larry Ward)는 " 구호단체인 굶주린 이들을 위한 식량(Food for the Hungry)은 난민촌에 꽃을 심는 구호 및 개발 단체로 알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주와 가난, 고통과 죽음의 현장에도 꽃을 심어야 한다. 꽃은 은혜와 그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가정과 직장, 학교와 이웃의 작은 공간들 속에 아름다움을 가져오는 것을 습관으로 삼으라.
하나님은 우리가 삶의 직물 속에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누리도록 만드셨다. 음악은 귀를 위한 것이고, 그림은 눈을 위한 것이며, 음식은 눈과 입맛을 위한 것이고, 춤은 몸을 위한 것이며, 조각은 눈과 촉각을 위한 것이다.
도시의 웅장한 풍경에서부터 창가의 작은 꽃상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만지는 모든 곳에 아름다움을 불어넣자.
아름다움은 결코 지나치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아름다움을 즐기고 소중히 여기며 기뻐하고 세상과 나누도록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를 돌보라
하나님의 장엄한 창조는 엄청난 아름다움의 원천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단순한 생각은 교회 안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을 신격화하는 환경주의에 반발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기후 재앙의 경고에 피로감을 느낀다. 하지만 단순한 반발만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성경적 원리에 기초한 건강한 창조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첫째, 그것은 단순한 "자연(nature)"이나 "환경(environment)"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이다. 하나님의 장엄한 작품은 정교한 예술성, 설계, 질서, 그리고 다양성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창조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창세기 2:9)
둘째,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창조세계에 무관심하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그것이 "심히 좋다"(창세기 1:31)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를 기뻐하시며(시편 104:31), 또한 그것을 돌보신다(시편 104:10–18, 27–28). 우리도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창조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어 그분의 창조세계를 다스리고(창세기 1:26, 28) 청지기로 돌보게 하셨다. 창세기 2:15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기서 "지킨다(care for)"는 것은 창조세계를 세심하게 보호하고 보존하며, 그것을 위대한 예술 작품처럼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경작한다(work it)"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도록 초청하신다는 뜻이다. 즉, 동산을 확장하고 발전시키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의성을 자신의 창조세계에 적용하여 더욱 아름답고 생산적인 혁신을 이루어 갈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마이클 노박(Michael Novak)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공동 창조자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창조 안에 숨겨진 가능성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창조세계는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비밀들과 풀어야 할 수수께끼들로 가득하다. 창조주는 인간의 지성이 그것들을 밝혀내기를 기대하신다. 세상은 하나님 손에서 처음부터 지금처럼 풍성하거나 아름답게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발전시키도록 맡겨졌다."
인간은 창조세계의 해충이나 재앙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절정이다.
물론 타락한 인간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고 오염시키며 훼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받은 자녀들은 창조세계의 지혜로운 청지기로서 원래의 사명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하여 창조세계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롬 8:21)되도록 도울 수 있다.
시편은 하나님의 창조가 그분의 존재와 능력과 선하심을 증거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세계가 그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고, 그 증언을 더욱 크게 울려 퍼지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한 몇 가지 간단한 방법이 있다.
- 길을 걷다가 쓰레기를 발견하면 줍기
- 공공장소를 청소하기
- 낙서를 지우고 환경을 정비하기
- 지역사회의 정화 활동을 조직하기
이렇게 함으로써 공동체 안에 아름다움을 더할 수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라
장인, 영화 제작자, 디자이너, 음악가, 요리사, 사진작가, 작가, 예술가 등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란다 코프(Landa Cope)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손으로, 귀로, 눈으로 받은 재능이 무엇이든, 그 재능은 하나님을 기념하는 것이며 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일부이다. 교회 안에서든 교회 밖에서든, 당신의 재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섬길 때 당신은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어야만 당신의 재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재능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이미 의미가 있다. 세상은 당신의 재능과 그것이 가져오는 아름다움과 기쁨을 필요로 한다. 주저하지 말고 새로운 르네상스를 시작하라.
최근 몇 년 동안 기독교 예술가들은 대중문화를 어설프게 모방하고 거기에 기독교적 요소만 덧붙인 수준 낮은 작품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야 할 사람들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창조적 작업을 할 때에는 대중문화를 모방하는 대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의 원리에 기초해야 한다. 예술성과 탁월함으로 돋보이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창조해야 한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에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3:23)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목회자들은 예술가와 디자이너, 장인들을 세우고 존중하라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은 문화로부터의 분리와 철수를 강조해 왔다. 그 결과 성도들은 세상 속에서 하는 자신의 직업이 별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음악, 영화, 미술, 디자인은 세속적인 영역으로 간주되었고, 예술가와 창작자들은 교회 안에서 이등 시민처럼 취급되었다.
그들의 작품이 가치 있으려면 반드시 종교적 주제를 다루거나 교회 사역 안에서 사용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다양한 직업과 소명으로 부르신다. 이등급 그리스도인의 직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목회자의 역할은 성도들이 자신의 직업 속에서 성경적 원리를 적용하여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섬기며, 나라를 축복하도록 돕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시므로 교회는 문화 속에서 아름다움이 흘러나오는 샘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교회 안의 장인과 예술가, 디자이너들을 격려하고 훈련하며 그들의 소명을 존중해야 한다.
특히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논리나 논쟁보다 아름다움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는 데 더 강력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할 때 아름다움을 중심에 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는 여러 통로를 사용하신다.
- 언어와 이성(logos)
- 도덕적 양심(ethos)
- 아름다움을 통한 감정과 정서(pathos)
교회는 오랫동안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는 데 집중해 왔다. 또한 죄와 도덕 문제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움(pathos)을 통한 증언을 거의 무시해 왔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선교에 대한 지나치게 실용적인 사고방식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 이외에는 모두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하나님에 대해 진실하게 전달하는 데 있어서 아름다움은 결코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객관적 진리와 객관적 도덕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던 사상에 깊이 물든 사람들에게는 말과 논리만으로 접근하는 것이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마치 교향곡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처럼 사람의 영혼에 강력하게 울려 퍼진다.
로버트 배런(Robert Barron)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복음 전도의 가장 좋은 방법은 아름다움에서 시작하여 선함으로, 그리고 진리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순서를 거꾸로 하면 복음 전도는 종종 매우 비효율적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순서로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많은 사람들의 영적 갈증을 그리스도의 생수로 해갈시켜 줄 기회를 얻게 된다. 또한 장차 올 하늘의 잔치를 미리 맛보게 하는 매력적인 예고편을 보여 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지상명령을 수행하게 된다.
진리를 전달하는 아름다움의 능력에 대한 통찰은 소련의 위대한 반체제 인사이자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에게도 있었다.
197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수상 연설에서 또 다른 위대한 러시아 작가인 도스토옙스키가 아름다움에 대해 남긴 유명한 말을 언급했다.
어느 날 도스토옙스키는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졌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오랫동안 나는 그것을 단지 말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피비린내 나는 역사 속에서 아름다움이 과연 누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한 적이 있는가? 아름다움은 사람을 고상하게 하고 고양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누구를 구원한 적이 있는가?
...그러나 진리를 길어 올려 살아 있는 힘으로 우리에게 제시한 예술 작품들은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를 강권하며, 앞으로 수많은 세월이 흐른다 해도 아무도 그것들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학자들이 말해 온 진리(Truth), 선(Goodness), 아름다움(Beauty) 이라는 오래된 삼위일체는, 우리가 물질주의적 자신감에 차 있던 젊은 시절에 생각했던 것처럼 공허하고 빛바랜 공식이 아닐지도 모른다.
만일 이 세 나무의 꼭대기가 결국 하나로 만나는 것이라면, 그리고 진리와 선이라는 너무도 분명하고 직접적인 줄기들이 짓밟히고 잘려 나가며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혀 있다면, 어쩌면 아름다움이라는 경이롭고 예측할 수 없으며 뜻밖의 줄기가 그 장애물을 뚫고 솟아올라 바로 그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세 가지 모두의 사명을 이루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의 말,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는 경솔한 수사가 아니라 예언이었던 셈이다.
결국 그는 놀라운 통찰을 허락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진리요, 진리는 아름다움이다.
존 키츠(John Ke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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