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세상을 치유하는 10가지 단어

9장 아름다움(Beauty)-4

lamp365 2026. 6. 5. 23:30

위조된 아름다움 (COUNTERFEIT BEAUTY)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개인의 표현이나 미적 취향을 위한 수단으로 축소시켰으며, 많은 현대 예술가들은 “단지 자신의 예술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할 뿐이며, 종종 충격을 주는 것 외에는 별다른 목적이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아름다움이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실재라고 믿지 않는다. 대신 무엇이 아름다운지 우리가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이렇게 말했다.

“사물 안에 있는 아름다움은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아름다움을 도덕적 필수 요소로 보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선택적인 장식품 정도로 여긴다. 특히 미국에서는 실용성이 우선시된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작동하는가?”와 “기능적인가?”이다. 우리는 좀처럼 “아름다운가?”를 묻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재정의 (BEAUTY REDEFINED)

개인의 주관적 감각이나 취향에 호소하는 미적 특성들의 결합.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개인적 선호와 자기표현의 문제이다.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HOW DID WE GET HERE?)

우리는 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탄생, 곧 계몽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앞 장들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시대에는 놀라운 과학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물질 세계의 위대한 신비들이 하나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발견들은 일부 지도자들 안에 하나님을 향한 교만한 반역심을 일으켰다.

“우리 조상들이 암흑시대에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의존하거나 그분께 사물의 원리를 설명해 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우주의 작동 원리와 인간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 신화나 전설에 의존할 필요도 없다.

과학과 인간 이성만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극적인 진실은 달랐다. 우리의 옛 원수는 인간 지식의 급속한 발전을 이용하여 가장 오래된 거짓말로 우리를 속였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창세기 3:5)

그 동일한 거짓말은 역사를 따라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그것은 여전히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선과 악,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

 

계몽주의는 서구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지식인들은 한동안 하나님을 창조주 또는 “제1원인” 정도로는 인정했지만, 점점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 분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단지 “창조주”로 보는 이 제한적인 관점마저도 1800년대 중반, 진화론의 등장과 함께 버려졌다. 진화론은 창조를 설명하는 데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고, 곧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날 대부분의 서구 엘리트들은 하나님이나 영적 세계를 믿지 않는다. “창조” 대신 “자연”이 자리 잡았으며, 존재하는 것은 목적 없는 우주 속의 물질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계몽주의적 하나님에 대한 반역은 특히 프랑스에서 깊은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의 원죄 교리를 거부한 프랑스 철학자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1712–1778)는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초를 놓았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왕정뿐 아니라 점점 부패해 가던 가톨릭 교회의 권위도 무너뜨렸다. 그 절정은 1793년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던 노틀담 성당에서 열린 의식이었다. 그곳 제단 앞에는  “이성의 여신” 상이 세워졌다. 그 상징은 매우 분명했다. 계몽된 인간 이성이 하나님을 대체한 것이다. 오늘날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세속화된 국가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사상에는 결과가 따른다. 계몽주의의 하나님 반역은 사람들이 예술과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예술가이자 미술사가인 로보트 플로르자크(Robert Florczak)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인상주의자들은 기독교적 사상과 원리에 뿌리를 둔 고전적 아름다움의 기준에 반기를 들었다.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들은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다’는 미적 상대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오늘날 모두가 인상주의를 사랑하지만, 혁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첫 세대는 상당한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세대가 거듭될수록 기준은 계속 무너졌고 결국 아무 기준도 남지 않았다. 남은 것은 오직 개인적 표현뿐이었다.”

인상주의의 반란은 서구 예술과 창조성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예술 혁명가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기준을 폐기했지만,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은 개인적 취향과 자기표현 외에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했다.

 

고전적 아름다움의 기준                                                          현대·포스트모던의 거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으로부터 시작
객관적 실재에 근거 주관적 자기표현에 근거
영감을 주고 고양하며 깊이를 더함 절망과 허무를 낳음
건설적이며 변화를 일으킴 파괴적이며 왜곡시킴
영혼을 세움 인간 정신을 손상시킴

 

성경적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한 거부는 지난 200년 동안 어떻게 나타났는가?

오늘날 고급 미술관들의 세계적 네트워크인 에덴 미술관(EDEN Gallery)은 포스트모던 예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은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해 예술의 의미를 확장해 왔다.”

예술은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자기표현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이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표현이 흉측할지라도 여전히 “예술”로 인정된다.

미국의 예술가 안드레스 세라노(Andres Serrano)의 유명한 사례를 생각해 보자. 그는 1987년에 「Piss Christ」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예수 십자가상을 작가 자신의 소변이 담긴 유리 용기 안에 담가 놓은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미국 국립예술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은 그의 창작 활동을 후원했으며, 그는 이 작품으로 수많은 상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반발하며 말했다. “이것에는 아름다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 추악하고 신성모독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롱을 당했고, 그런 판단을 내릴 권리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로버트 플로르자크(Robert Florczak)는 이렇게 말한다.

“심오한 것, 영감을 주는 것, 아름다운 것은 이제 새로움과 다름, 그리고 추함으로 대체되었다. 고전적 기준은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과 ‘죽어가는 갈리아인(The Dying Gaul)’ 같은 작품을 세상에 주었지만, 현대와 포스트모던 기준은 소똥과 음란한 이미지로 장식된 ‘성모 마리아(Holy Virgin Mary)’와, 인조 소변 웅덩이까지 포함한 채 쪼그리고 앉아 소변을 보는 여성 경찰관을 묘사한 수상작 조각상 ‘페트라(Petra)’를 우리에게 주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할 때, 객관적인 진리와 선함뿐 아니라 객관적인 아름다움도 잃게 된다. 오늘날 창작 활동의 상당수는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대한 공개적인 반역에 불과하다. 그 결과 예술은 점점 더 흉측하고, 혐오스럽고, 역겨우며, 기괴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고전적 기준에 대한 반란은 순수예술의 영역을 훨씬 넘어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그것은 도시계획, 건축, 문학, 음악, 교육 등 인간 활동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창의성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그 쓰디쓴 열매를 곳곳에서 본다. 미국의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칠레의 산티아고에 이르기까지 많은 대도시들이 낙서로 뒤덮여 있고, 거리에는 쓰레기와 심지어 사람의 배설물까지 널려 있다. 이전 세대가 남긴 웅장한 건축물과 도시 설계는 철저히 훼손되었다.

다로우 밀러(Darrow Miller)는 옛 소련 지역을 걸었던 경험을 회상하며, 아파트 건물들이 “무너져 가고 있었고, 음침하고, 회색빛이었다. 그것들은 집이라기보다 감옥 독방에 더 가까워 보였다.” 고 말한다.

하나님을 거부하면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추함만 남게 된다. 그런 세상은 누구도 살고 싶어 하지 않을 세상이다. 아름다움이 제거된 세상의 결과는 엄청나며 영혼을 파괴한다.

 

복음주의 교회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안타깝게도 복음주의 교회는 아름다움의 고전적 기준과 그 위대한 유산을 적극적으로 수호하고 보존하기보다는, 대부분 그것을 무시하고 아름다움을 중요하지 않은 주제로 취급해 왔다. 한 세기 이상 성경을 믿는 교회는 문화와의 분리와 철수를 강조하는 신학 아래 놓여 있었다. 이 신학은 서구 사회, 특히 미국의 세속화가 심화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다.

이 관점의 지지자들에게 세속 세계는 심판과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며, 한 기독교 저자가 “늦었지만 위대한 지구 행성(The Late, Great Planet Earth)”이라고 부른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이다.

이 신학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위는 하늘과 교회 안에만 있을 뿐 그 외의 영역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적 원리에 기초하여 문화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나 문화 참여는 경시된다. 문화 속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은 교회 안의 사역이나 선교 활동뿐이며, 나머지 직업은 전임 사역자를 지원하기 위한 재정을 제공하는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기독교인들이 문화를 변화시키려는 비전을 잃어버린 동안,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세속적 이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핵심 사상과 원리가 가장 중요한 문화 기관들 속에 깊이 자리 잡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서구 사회를 자신들의 사상으로 효과적으로 “제자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내 친구 다로우 밀러(Darrow Miller)가 말하듯이, “교회가 나라를 제자 삼지 않으면, 나라가 교회를 제자 삼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항상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만일 성경에 뿌리를 둔 참된 사상을 가진 교회가 아니라면, 거짓되고 파괴적인 사상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무너지기 시작한다.

우리 문화 기관들, 특히 교육 기관들의 기초에 거짓된 신념들이 놓여 있다면, 그 영향을 그리스도인들 역시 피할 수 없다. 교회는 문화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교회는 교사, 농부, 사업가, 디자이너, 장인, 건축가, 예술가 등으로서 문화 속에 존재한다.

만일 이 잘못된 신학이 암시하듯 성경이 이러한 인간 활동의 영역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거짓된 현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들이 그 기초를 이루고 있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름다움에 관한 문제에서는 특히 그렇다.

 

복음주의 교회는 아름다움에 대한 성경적 진리를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대신 현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잘못된 아름다움 개념을 받아들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름다움이 전적으로 주관적이며 개인의 취향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름다움의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본질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거나, 아름다움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한다.

다로우 밀러에 따르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예술을 단지 장식 정도로 생각하거나, 예배와 전도 프로그램을 돕는 부가적 요소로 여긴다. 예술을 ‘교회적인 것’으로만 보며, 있으면 좋지만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 어쩌면 예술을 사치스럽고 돈 낭비이며 세속적인 것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우리의 교회 건물을 생각해 보라.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복음주의 교회와 은사주의 교회들은 너무나 자주 기능성만을 추구한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넓은 공간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우리는 창고처럼 보이는 교회 건물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된다. 실제로 많은 교회가 문자 그대로 창고 건물이다.

우리의 예배 음악도 마찬가지다. 종종 문화 속 대중음악의 기준을 모방하면서도, 점점 낮아지는 수준의 탁월성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 예술가, 디자이너, 장인 그리고 창작자들에게 있어서, 문화와의 분리 및 철수를 강조하는 신학은 자신들의 창조적 은사가 교회 예배나 기독교인들을 위한 오락 외에는 별다른 가치가 없다고 잘못 믿게 만들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것은 변화하고 있다. 소수의 용감한 기독교 영화인, 예술가, 장인, 음악가들이 성경적 아름다움의 풍성한 전통을 회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하고 속된 것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려는 비전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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