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믿음의 긍정적인 문화의 결과들
신뢰성(trustworthiness), 믿을 만함(dependability).
이것들은 사회를 하나로 묶어 주는 접착제와 같다. 사람이나 제도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다면 사회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사실 과학조차도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다.
과학적 탐구는 자연법칙이 매우 정확하고 질서 정연하며 규칙적이라는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처럼, “하나님은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으신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존재의 실재가 그분의 창조 세계를 관찰하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드러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롬 1:19-20). 창조 세계는 아름다움, 질서, 목적, 그리고 정교한 설계를 보여 준다. 왜냐하면 그것이 선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믿음에 달린 것이 너무나 많다. 잘 조직되고, 제대로 기능하며, 번영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와 제도들에 대한 높은 수준의 신뢰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신뢰가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 자연법칙의 신뢰성에 대한 믿음
- 사람들의 정직성과 신뢰성에 대한 믿음
- 사람들이 만든 법적·정부적·시민적 제도에 대한 믿음
그렇다면 사회의 신뢰와 안정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참되시고 정직하시며 신뢰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이라는 비옥한 토양에서 자라난다.
대로우 밀러(Darrow Miller)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혹은 신들)의 형상을 따라 사회를 세운다.”
또 시편 115편 8절은 이렇게 말한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변덕스럽고 예측할 수 없으며 복수심 많은 이교의 신들을 숭배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과 제도에 대한 신뢰 수준도 낮아진다. 그 결과 각종 기능 장애, 부패, 깨어짐이 발생한다. 반대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오직 물질적 우주만을 인정하며, 목적도 인도자도 없는 혼돈의 진화 과정과 “적자생존”만을 절대 법칙으로 보는 사회 역시 신뢰의 근거를 가질 수 없다.
목적 없는 우주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가? 맹목적인 진화 과정의 산물인 인간의 두뇌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가?
결국 과학은 순수한 유물론적 세계관과 양립하기 어렵다. 또한 모든 인간관계가 결국 권력과 지배를 위한 경쟁으로 전락한다면, 사람들과 그들이 만든 제도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끊임없는 권력 투쟁에 빠진다. 여러 집단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제도를 조작하려 한다. 그 결과 신뢰는 무너진다.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며,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을 억압하기 위해 제도와 시스템을 조작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오늘날 서구 사회의 교육, 대기업, 법률, 정부 기관을 지배하는 신마르크스주의(neo-Marxist) 비판이론의 세계관이다.
사회가 이러한 거짓 세계관을 받아들이면 믿음과 신뢰는 침식되고 만다. 아무도 신뢰할 수 없게 되면 관계가 무너지고,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진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서구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결혼이 붕괴되고, 결혼을 하지 않고, 출산율은 급락하고 있다. 집단 간의 의심과 적대감이 증가하고 있다. 사회 제도에 대한 신뢰는 역사상 최저 수준에 이르렀다.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서로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잘못된 믿음의 정의를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믿음의 재정의 (FAITH REDEFINED)
마크 트웨인은 한때 이렇게 말했다. “믿음이란 당신이 사실이 아니라고 알면서도 믿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믿음에 대한 오해는 이제 서구 사회에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증거보다는 영적인 직관에 근거하여 하나님 또는 종교의 교리를 강하게 믿는 것.”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믿음을 “증거가 없는데도, 심지어 증거에 반해서까지 갖는 맹목적 신뢰”라고 말한다.
버트런드 러셀 역시 믿음을 “증거가 없는 어떤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정의했다.
즉,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은 한마디로 “맹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들은 성경이 믿음을 정의하는 것과 정확히 반대된다. 어떻게 해서 믿음의 참된 의미가 이처럼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을까?
믿음의 재정의 (FAITH REDEFINED)
"증거를 고려하지 않거나, 심지어 증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이 참되다고 인정하는 것."
그 답은 어떤 사람들이 “계몽주의 신화(Enlightenment Myth)” 라고 부르는 것의 형성에 있다. 이 잘못된 이야기에 따르면 과학과 종교는 서로 전쟁 상태에 있다. 과학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려 주며, 따라서 공공적으로 권위를 가지며, 공공 정책과 법률, 교육의 기초 역할을 한다. 반면 과학이 연구할 수 없는 것들―영적 실재, 하나님, 도덕, 윤리―은 “믿음(faith)”과 개인적 신념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계몽주의 신화에 따르면, 기독교는 교묘하게 만들어진 동화에 불과하다. 만일 당신이 증거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고 싶다면 그것은 당신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 믿음은 사적인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 공적 영역은 종교가 아니라 사실과 과학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이 이야기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공적 인물들의 영향 아래서 그들은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를 비이성적이며 반과학적인 것으로 본다. 그들은 믿음을 신화와 동화의 영역으로 밀어 넣었다. 그들의 사고방식에서 믿음은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들 수는 있지만 실제적인 것은 아니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믿음은 필연적으로 후퇴한다.
이 거짓되고 파괴적인 이야기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서구의 세속화를 이끈 주요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 뿌리는 15세기 유럽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진리에 관한 장에서 이미 일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았지만, 여기서 다시 간단히 검토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소위 “계몽주의 시대(Age of Enlightenment)” 동안 현대 과학은 전성기를 맞이했고, 우주의 위대한 신비들이 하나씩 그 비밀을 드러내고 있었다. 발견의 흥분과 함께 오래된 교만이 많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마음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과학과 인간의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나 천사, 악마와 같은 초자연적 영역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전의 “암흑시대(Dark Ages)”에 하던 방식이었다.
고(故)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계몽주의 신화의 본질을 정확하게 보여 준다.
“과학을 이해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이제 과학은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이 신화는 과학을 높이지만 실제로는 준종교적 세계관이다. 그것의 올바른 명칭은 유물론(materialism), 자연주의(naturalism) 또는 과학주의(scientism) 이다. 오늘날 이것은 탈기독교화된 서구 사회에서 지배적인 세계관이며, 포스트모더니즘과 신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21세기의 주요 이념들을 떠받치고 있다.
1장에서 논의했듯이, 계몽주의 신화는 성경학자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 가 “사실/가치 분리(Fact/Value Divide)”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믿음/사실 분리(Faith/Facts Divide)”라고도 볼 수 있다.
“믿음(Faith)”
- 종교, 윤리, 도덕성
- 개인적 신념이며 공적으로 권위가 없음
-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며 증거에 근거하지 않음
“사실(Facts)”
- 과학을 통해 알려지며 증거에 기초함
- 공적으로 권위를 가짐
- 실제적이며 진실함
이 믿음/사실 분리에 따르면, 기독교는 역사적 사실, 증거, 이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사실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반과학적이며 반이성적이다. 그것이 이른바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사실 분리와 그것을 낳은 계몽주의 신화는 모두 거짓이다. 기독교와 과학 사이에는 충돌이 없다. 둘 다 믿음을 필요로 한다. 과학은 변하지 않는 자연법칙과 창조 세계의 질서와 예측 가능성에 대한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
오늘날의 아이러니는 많은 저명한 과학자들이 거짓된 믿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증거를 고려하지 않거나, 심지어 증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이 참되다고 인정한다.”
앞서 언급한 옥스퍼드 대학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를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생물학은 목적을 가지고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것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는 DNA 분자, 인간의 눈, 벌새의 날개와 같은 생명체들이 설계와 목적의 압도적인 증거를 보여 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분명한 증거를 거슬러 진화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이러한 것들이 실제로는 설계된 것이 아니라 목적 없는 물질적 진화 과정을 통해 우연히 생겨났다고 결론짓는다.
진정한 믿음도 진정한 과학도, 둘 다 진리를 정직하게 추구하며 증거가 인도하는 곳을 따라간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는 압도적이며 날마다 더 늘어나고 있다.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 우주가 얼마나 정교하게 “미세 조정(fine-tuned)”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라. 전자의 질량, 중력의 세기, 중성자의 수명, 또는 이와 유사한 수백 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라도 아주 조금만 달라졌다면, 복잡한 생명체는 우주 어디에서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에릭 메택사스(Eric Metaxas)는 2014년 《월스트리트 저널》 기고문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늘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행성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알려진 매개변수는 200개가 넘으며,
그 모든 조건이 정확하게 충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만일 목성과 같은 거대한 행성이 근처에 없어
소행성들을 끌어당기지 못한다면, 지금보다 천 배나 많은 소행성들이 지구에 충돌할 것이다.
우주에서 생명이 존재할 확률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존재하며, 지금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 수많은 매개변수가 모두 우연히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는가? 어느 시점에서는 과학이 우리 존재가 무작위적 힘의 결과일 수 없음을 시사한다고 인정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겠는가?
메택사스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하나님이 이러한 완벽한 조건들을 창조하셨다고 가정하는 것이, 생명을 유지하는 지구가 상상을 초월하는 확률을 뚫고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고 믿는 것보다 훨씬 적은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가?”
우주가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고 계속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맹목적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다. 왜 그들은 그렇게 하는가? 그들의 반역적인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더 높은 권위에 책임을 져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 은 좋은 예이다.
“상식에 반하는 과학적 주장들을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과학과 초자연 사이의 실제 갈등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우리는 과학의 일부 구성물이 명백히 터무니없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편에 선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유물론에 대한 선행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과학자들에게 있어, “유물론은 절대적이다. 우리는 신적 존재가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고 말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한 저명한 과학자가 증거를 고려하지 않거나 심지어 증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유물론적 세계관을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본다. 왜 그런가? 르원틴은 매우 솔직하다.
“우리는 신적 존재가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물론은 과학적 증거가 그 방향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참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이 참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참인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물론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이것은 과학으로 가장한 거짓 종교이다. 그것이 바로 과학주의(scientism)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과학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믿음뿐 아니라 참된 과학도 회복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가지고 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올바른 이성은 건전한 믿음을 위협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올바른 이성, 명료하고 논리적인 사고, 그리고 증거가 이끄는 곳을 따르려는 마음을 다시 붙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계몽주의 신화(Enlightenment Myth)와 사실/믿음 분리(Facts/Faith Divide)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기독교와 과학이 서로 대립하거나, 혹은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작동하며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고 하는 잘못된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일부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성경에 대해 어려운 질문을 하는 것이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탐탁지 않게 여겨진다. 어떤 질문들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젊은이들이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얻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어려운 질문을 하지 마라. 의심하지 마라. 생각하지 마라. 이성을 신뢰하지 마라. 그냥 믿어라.”
그러나 믿음은 어려운 질문을 요구한다. 어떤 대상이나 사람이 신뢰할 만하다는 증거도 없이 어떻게 그에게 믿음을 둘 수 있겠는가? 만일 성경이 스스로 주장하는 것처럼 내가 전 존재를 맡길 수 있는 절대 진리라면, 그것은 가장 철저한 검증을 견뎌야 마땅하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1장에서 소개된 대로 밀러(Darrow Miller)가 가졌던 것과 같은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즉, 자신들의 소위 “믿음”이 기독교를 참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객관적 실재나 성경의 진실성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이다. 그들은 소위 “믿음의 힘(power of belief)”을 믿는다.
이 생각은 부분적으로 20세기 후반 서구 문화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부상한 데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적 진리를 거부하고 개인적이고 사적인 “진리”를 선호한다. 이것은 믿음의 개념에도 똑같이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믿음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된다. “당신에게 믿음이 효과가 있다면 좋다. 그것은 당신에게는 ‘참’일 수 있다.” 이러한 주관적 믿음은 이성이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과 반대될 수도 있다. 주관적 믿음은 오직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그것은 공적 실재가 아니라 사적인 믿음이다.
모더니즘 신화와 사실/믿음 분리에 기초한 이러한 비극적인 믿음의 재정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그리고 비그리스도인들까지도)로 하여금 믿음을 마치 마법 주문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무엇인가를 원한다면 그저 그것을 충분히 강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당신의 믿음이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줄 것이다. 이런 잘못된 관점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 자체에 대한 믿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원하는 삶을 얻기 위해 믿음의 신비로운 힘을 믿는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를 현실로 “끌어당기려” 하는 운동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자체에서 나온다.
1998년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영화 이집트의 왕자(The Prince of Egypt) 의 주제가 '당신이 믿을 때'(When You Believe)는 이러한 잘못된 믿음관의 좋은 예를 보여 준다.
기적은 일어날 수 있어요
당신이 믿을 때
희망이 연약할지라도 꺼지기 어렵죠
어떤 기적을 이룰 수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당신이 믿을 때, 어떻게든 이루어질 거예요
당신은 이루게 될 거예요, 믿기만 한다면
“믿기만 하면” 어떤 기적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가? 이 노래에서 믿음의 대상은 없다. 오직 “믿음” 그 자체만 있을 뿐이다. 믿음 자체가 기적을 이루는 마법의 능력을 가진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산을 옮기고(마태복음 17:20) 암 환자를 치유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다.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참된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뿐이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37).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행하실 수 있으며, 우리는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음을 믿도록 초대받았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적극적으로 그 신뢰를 표현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기적을 행해 달라고 구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마가복음 11:24).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기만 기다리는 수동적인 방관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일에 우리를 동참하도록 은혜롭게 초대하신다. 우리가 기도할 때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즉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며, 그분께는 너무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면, 우리는 그분께 영광과 존귀를 돌린다. 그것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지,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의 “믿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믿음에 관한 이 장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라. 당신도 '계몽주의 신화'와 '사실/믿음 분리'를 받아들였는가? 그렇다면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여전히 교회 안에 깊이 뿌리내린 잘못된 믿음관이다. 그것은 거의 어떤 다른 거짓 사상보다도 기독교에 더 큰 해를 끼쳤다. 실제로 그것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세속화를 촉진했고, 그 결과 빈 교회 건물들과 급격히 감소하는 기독교 인구를 남겼다.
만일 당신의 믿음관이 이 장에서 설명한 거짓 믿음에 더 가깝다면, 나는 당신에게 회개를 권한다. 회개란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 거짓임을 알게 된 믿음을 버리고 진리로 대체하라.
이것은 당신이 아마도 처음으로 자신의 믿음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함을 의미할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가 참이라고 믿는 이유가 다른 사람의 믿음, 대개 부모의 믿음 때문이다. 혹은 대로우 밀러(Darrow Miller) 처럼 “믿음이 기독교를 참되게 만든다”, “어려운 질문은 하지 말고 그냥 믿어라”는 거짓을 배웠을 수도 있다. 그들은 믿음이 이성, 사실, 증거와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거짓말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당신의 믿음은 그것들이 완전히 참되고 신뢰할 만하다는 당신 자신의 확신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만약 질문이나 의심이 있다면 그것을 묻어 두거나 무시하지 말라. 질문의 형태로 표현하고, 정직하게 답을 찾으라. 그리고 증거가 이끄는 곳을 따르겠다고 결심하라.
그렇게 한다면, 결국 여정의 끝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진리다”(요한복음 14:6)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믿는 것이 참되다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충분한 확신”을 갖는 것을 대신할 것은 없다. 시련이 오고 믿음이 시험받을 때 그것이 필요하다. 불시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신뢰할 만하시며, 당신은 그분의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다는 개인적 확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결단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그 믿음은 단지 “구원받는 믿음”에만 머무르는가? 그것이 이 세상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는가? 당신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시며 왕이시다. 교회 안에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는 믿지만 최고의 권위자로는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선택권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신다.
예수님이 당신의 구주라면, 그분은 또한 당신의 전적인 충성을 요구하신다.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올바른 응답은 완전한 항복이다.
우리는 모든 관계를, 모든 재정과 자원을, 우리의 일과 계획과 희망과 꿈을 그분께 맡겨야 한다. 우리의 태도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처럼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누가복음 22:42)여야 한다.
이보다 못한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반쪽짜리 기독교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지만,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일, 가정, 돈, 미래에 관한 문제에서 성경보다 다른 출처를 더 신뢰할 수 있다. 성경은 개인 구원에 대해서만 말할 뿐 결혼, 재정, 관계, 농업, 의학, 법, 정부, 사업 등에는 가르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해, 당신은 그것을 더 좋아할 수도 있다. 삶의 특정 영역에서 예수님이 간섭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인정과 박수를 얻고 싶어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거짓 믿음이다. 그것은 주와 왕이신(Lord and King)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그분께 항복되어야 한다. 그분은 전부를 요구하신다. 어떤 이들이 말했듯이, 예수님은 모든 것의 왕이시든지, 아니면 전혀 왕이 아니시다.
그분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의 최고 권위이다. 단지 구원이나 교회 문제 같은 영적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와 법과 계명은 삶과 일의 모든 부분을 지탱해야 한다.
당신의 선택과 행동은 당신이 무엇을 궁극적으로 신뢰하는지 드러낼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이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지, 아니면 배우자나 자녀, 재정, 미래 계획을 더 신뢰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두 왕을 섬길 수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쪽을 사랑하면 다른 쪽을 미워하게 된다(마태복음 6:24). 결국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것은 상처와 비참함으로 이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과 의미와 목적을 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라. 만일 아직도 주님께 내어드리지 않은 영역이 있다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열린 손으로 그분께 맡기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을 온전히 신뢰할수록, 당신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분의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와 함께 기쁨과 목적의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신 자신의 신뢰성을 점검하라. 성경의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회는 높은 수준의 개인적 신뢰를 갖게 된다. 하나님은 완전히 신실하시고 참되시며, 우리가 그분을 예배할 때 우리는 점점 그분을 닮아 가기 때문이다(요한일서 3:2).
친구, 가족, 사업 관계,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신뢰할 만한 사람인가? 손해를 보더라도 약속을 지키는가?”(시편 15:4)
“특히 결혼 서약을 지키고 있는가? 나는 인격적 정직성을 가지고 있는가? 나의 말과 행동은 일치하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 혹은 다른 누군가를 신뢰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은 회개의 기회다. 오늘날 우리는 높은 이혼율, 만연한 냉소주의, 제도에 대한 불신 속에서 신뢰의 붕괴를 목격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한 명도 꼽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은 재앙적이며, 우리가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문명 자체가 파괴를 향해 갈 수 있다.
신뢰를 회복하는 일은 우리 각자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회 전체를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의 관계는 바꿀 수 있다. 우리의 가정, 교회, 스포츠 팀, 직장을 바꿀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당신은 자신의 영향력 범위 안에서 신실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됨으로써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어떻게 가능한가?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분이 완전히 신뢰할 만하신 분임을 알게 될 때, 그분은 당신에게 그렇게 살아갈 능력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마지못해 완수해야 할 과업이 아니라, 그분의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묵상하며 기쁨으로 누려야 할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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