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세상을 치유하는 10가지 단어

7장 정의(Justice)-4

lamp365 2026. 6. 2. 12:54

해결책은 무엇인가?

“혁명(Revolution)” 이 이념적 사회정의(ideological social justice)의 해답이다. 억압받는 피해자들과 그들의 동맹자들은 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기초한 연합을 형성하여, 억압적인 권력 구조를 폭로하고 해체하며 궁극적으로 전복해야 한다.


사회정의의 권력투쟁이라는 제로섬(zero-sum) 세계관에서는 “서로를 인정하며 공존하자(live and let live)”는 관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생(win-win)도 없고 타협도 없다. 용서도 은혜도 없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도 없고,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를 빼라”는 자기성찰도 없다. 오직 불만, 정죄, 보복만 있을 뿐이다. 편협한 사람들, 증오하는 사람들, 억압자들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성경적 세계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점에서는 사회정의 혁명가들과 동의한다. 우리의 사회는 무너져 있으며 변화가 필요하다. 세상에 가득한 불의와 고통, 아픔과 비탄을 볼 때 우리는 문화적 변혁이 필요하다. 실제로 억압적인 제도와 구조, 기관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사람들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를 황폐하게 만드는 것을 방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문제의 핵심은 깨어진 인간관계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이 뿌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지속적인 사회 변화는 불가능하다. 놀라운 복음은 하나님과의 용서와 화해의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반역한 자녀들과 화해하기 위한 주도권을 취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17)

 

궁극적으로 불의는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죄의 문제이다. 따라서 유일한 해결책은 특정한 ‘억압자’ 집단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개인적이고 마음 깊은 차원의 변화이다. 성경적 변화는 내면과 외면, 개인과 사회, 타락한 인간의 마음과 생각의 새로움 그리고 사회 개혁을 모두 포함한다.

성경적 사회 변화는 내면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안에서 밖으로(inside-out) 의 과정이다. 요한일서 1:9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와 같은 마음의 새로움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성화의 역사로 이어지며 변화된 인격을 낳는다. 물론 노예제도, 낙태, 부패, 음란물 산업, 인신매매와 같은 제도적 악은 실제로 존재하며 반드시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과 그리스도 안의 새 생명 없이는 지속적인 사회 변혁에 대한 희망이 없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도덕적 의무는 무엇인가?

사회정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이고 초월적이며 보편적인 도덕의 개념을 거부한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법이 되는 자율적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도덕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도덕 의식을 깊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분리된 도덕은 끊임없이 변하고 결국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는 사실상 도덕 혁명을 경험해 왔다. 과거에는 선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 즉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혼 전 순결,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평생 결합으로서의 결혼, 심지어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성 구분까지도 점점 편협하고 혐오적이며 차별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체계에서는 인간이 도덕적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라 억압 시스템의 피해자 또는 수혜자로 규정되기 때문에, 죄책감이나 무죄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집단 정체성에 의해 결정된다. 피해자라면 도덕적으로 무죄이며, 억압자라면 실제 행동과 관계없이 도덕적으로 유죄가 된다.

사회정의 도덕관의 중심에 있는 이러한 죄책감과 무죄 개념은 복음과 양립할 수 없다. 그것은 거짓 복음이다. 죄의 결과가 세대를 넘어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렘 32:18), 죄의 책임은 각 개인에게 있다(겔 18:20).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사랑하시며(계 7:9),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고(행 10:34), 어떤 집단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특별 대우를 하지 않으신다(갈 3:28).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는다(엡 2:8–9).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사도 바울이 당시의 거짓 복음들에 대응했던 것처럼 반응해야 한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8)

 

성경적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도덕적 의무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마 22:37–40).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며(요 14:15), 이웃 사랑에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포함된다. 이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핵심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억압받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돌볼 도덕적 의무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념적 사회정의가 정의하는 방식으로 피해자와 억압자를 규정하지 않는다. 억압자는 반드시 백인 남성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피해자 역시 유색인종, 여성, 또는 LGBTQ 구성원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피해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길가에서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과 같은 모습에 더 가깝다.

그렇다. 우리는 억압받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를 이념적 사회정의의 전제에 따라 판단해서는 안 되며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강력한 체제에 속한 사람들을 무조건 구제 불가능한 악인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들도 사랑하신다고 보여준다. 로마 제국의 세리였던 삭개오, 예수님을 정죄했던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었던 니고데모, 그리고 로마 군인 고넬료는 모두 초기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에 기초한 객관적 도덕성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최종 권위이다. 하나님의 도덕법에 근거하지 않은 어떤 형태의 정의도 결국 불의를 낳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타락한 인간 이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심판은 있는가?

사회정의 세계관에는 최후의 심판(final judgment) 을 위한 자리가 없다. 악으로 규정된 것은 남녀가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지금 여기에서 제거해야 한다. 과거 소련에서는 “자본가들”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는 킬링필드를 만들었고, 중국 공산당은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서구 사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아직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 정의관이 아니다. 완전한 정의를 집행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완전한 재판장이신 하나님뿐이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 엄청난 책임을 완벽하게 수행하실 수 있다. 만유의 심판자이신 그분은 선한 것은 보존하시고 악한 것은 제거하실 것이다.

오직 완전하고 거룩하며 의로우신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다. 우리 모두가 가장 바라는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실 수 있는 분도 오직 그분뿐이다. 최종적인 판결은 하나님께서 내리실 것이지만, 궁극적인 정의는 그분의 재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자비와 용서의 기회를 베푸시며, 그분의 백성들도 성경적 정의를 실천하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이러한 기초를 이해하면 왜 이념적 사회정의가 더 이상 하나님의 법에 대한 개인적·사회적 순종으로 여겨지지 않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억압적 체계를 “폭로하고” “전복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구조를 억압적으로 만드는가? 바로 집단 간의 격차, 즉 “불평등”을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형평성(Equity) 대 평등(Equality)

“형평성(equity)”이라는 단어는 이념적 사회정의 세계관에서 거의 신성한 의미를 지닌다. 평등(equality)은 본래 매우 성경적인 개념이지만, 사회정의가 이해하는 평등은 성경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다.

성경에서 평등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에서 형평성은 결과의 평등(equality of outcome)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동일성(sameness), 획일성(uniformity), 상호대체 가능성을 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정의가 “다양성”을 강조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사람들을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회정의 이념은 격차(disparity)를 곧 불의와 억압으로 간주한다. 어느 집단 사이에 격차가 존재하면, 그 원인은 반드시 체계적 또는 제도적 억압 때문이라고 가정한다.

예를 들어, 구글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가운데 80%가 남성이고 20%가 여성이라면, 이러한 차이는 곧 체계적 남성 특권과 성차별의 증거로 해석된다. 정의가 곧 동일성이라면, 구글은 남성과 여을 의미하기 때문에 구글은 남성과 여성 엔지니어 수를 같게 만들기 위해 채용 정책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가 정말 제도적 성차별 때문일까? 아니면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심리적 특성이나 삶의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되려는 성향에 차이가 있어서 일까? 이념적 사회정의가 지배적인 환경에서는 이러한 질문 자체가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단지 그것을 물었다는 이유료 해고된 전직 구글 소프트웨어 인제니어 제임스 데이모어에게 물어보라. 

 

이러한 동일성에 대한 요구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트랜스젠더가 자신이 원하는 화장실이나 탈의실을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는 규정은 사람들을 다르게 대우하기 때문에 불의하다고 여겨진다. 동성애자들을 결혼 제도에서 제외하는 법 역시 동성 커플을 이성 커플과 동일하게 대우하지 않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정의가 그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 세계관에서는 심지어 가족도 의심의 대상이 된다. 콜슨 기독교 세계관 센터의 존 스톤스트리트(John Stonestreet)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과학 연구는 오래전부터 양부모 가정이 자녀들에게 엄청난 이점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런 가정의 아이들은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이 더 높고, 학대의 피해자나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더 낮으며, 약물 남용이나 범죄에 연루될 가능성이 적고, 이러한 장점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만약 사회정의가 결과의 평등, 즉 동일성을 요구한다면, 사랑이 넘치는 가정은 오히려 불의한 것이 된다.  정의는 동일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워릭 대학교의 아담 스위프트(Adam Swift) 교수와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슨 캠퍼스의 해리 브라이하우스(Harry Brighouse) 교수에 따르면, “만약 가족이 사회 속 불공정한 [불평등의] 원천이라면, 가족 제도를 폐지할 경우 더 대등한 경쟁의 장(level playing field)이 마련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럴듯해 보인다.”

이러한 논리가 바로 이념적 사회정의의 핵심이다. 

다양성(Diversity)

형평성과 함께 이념적 사회정의의 또 다른 최고 가치는 “다양성(diversity)”이다. “다양성, 형평성, 포용”은 사회정의 운동의 핵심 구호가 되었다.

성경도 다양성을 긍정한다. 그러나 정의와 평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경적 다양성은 사회정의가 말하는 다양성과 매우 다르다.

다양성은 단순히 차이와 다양함을 의미한다. 성경은 다양성을 축복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엄청난 다양성이 존재하는 세상을 창조하셨다. 꽃도, 나무도, 곤충도, 사람도 하나같이 모두 다르다. 지금까지 지구를 살아온 수십억 명 가운데 완전히 같은 사람은 둘도 없다.

하나님은 다양성을 사랑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연합(unity)도 사랑하신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깊은 연합을 가진다.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성경은 “연합은 있지만 획일성은 없다(Unity, but not uniformity)”고 가르친다.

다양성 없는 연합은 전체주의적 획일성을 낳고, 연합 없는 다양성은 혼란과 갈등을 낳는다. 인간의 번영을 위해서는 둘 다 필요하다.

이념적 사회정의는 실제로는 다양성보다 획일성을 더 중시한다. 이 세계관이 인정하는 다양성은 개인의 다양성이 아니라 집단의 다양성이며, 모든 집단 차이를 동일하게 존중하지도 않는다.

이념적 사회정의는 인간을 독립적인 개인으로 보지 않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대변인으로 본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과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미국 하원의원 아야나 프레슬리(Ayanna Pressley)는 2019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갈색 얼굴이지만 갈색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흑인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흑인도 필요 없다. 무슬림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무슬림도 필요 없다. 퀴어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퀴어도 필요 없다.”

  

그녀가 강조하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에 당신이 황인종, 흑인종이나 무슬림 또는 동성애자인데 당신의 집단과 같이 생각하고 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더 이상 필요없는 사람이다.  이것은 다양성의 축하가 아니라 집단 순응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회정의 지지자들은 “모든 사람과 문화, 정체성과 관점에 대한 존중”을 말하지만, 그들의 다양성의 가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가장 억압받는 집단인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에게 사회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다양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LGBTQ+ 활동가 단체들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배제의 대상으로 점점 더 삼고 있다. 기독교인 제빵사 잭 필립스(Jack Phillips)의 사례를 보라. 그는 동성 결혼식을 위한 맞춤형 케이크 제작을 정중히 거부했다는 이유로, 콜로라도 주 정부로부터 반복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벌금을 부과받았으며, 사업을 포기하도록 압박을 받았다. 사회정의 활동가들에게 있어, 필립스와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다양성에 대한 인정도 없고, 포용도 없으며, “차이에 대한 존중”이나 “모든 사람과 관점에 대한 관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새로운 정통성에 순응하라는 압력이며, 그렇지 않으면 배척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관용인 척 가장한 노골적인 불관용이다. 이것은 “다양성”으로 위장한 획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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