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과 불의
만약 정의가 하나님의 완전한 도덕적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타락한 세상에 불의가 가득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 때문에 우리는 정의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가진다. 우리 자신이나 친구들,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는 정의를 외치지만, 정작 우리가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할 때는 정의를 불편하게 여긴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변명을 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모든 증거가 있는데도 스스로 무죄하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여기서 더 심각해진다. 우리는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만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께도 죄를 지었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었다. 죄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의 궁극적인 기준이시다.
하나님은 불의에 무관심하지 않으시다. 불의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와 경건하지 않음으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로마서 1:18).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더 이야기하기 원한다. 물론 그것들은 모두 놀랍고 참된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의에 대한 미움을 함께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불완전하게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의 긍휼은 불의에 대한 미움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불의의 피해자들을 향해 깊은 긍휼을 품으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눈물을 보시고 병에 담아 두신다(시편 56:8). 하나님은 부르짖는 가난한 자와 도와줄 사람이 없는 고통당하는 자를 구원하신다. 약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을 죽음에서 건지신다. 압제와 폭력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는데, 이는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기 때문이다(시편 72:12–14).
하나님은 약한 자들, 소외된 자들,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자들에 대해 진노 가운데 일어나신다. 하나님은 모든 압제자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좋은 소식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역으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과 진노에서 벗어날 길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그 길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찬란하게 드러낸다.
큰 딜레마
하나님의 정의는 그분의 모든 속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랑과 자비 같은 다른 속성들로도 나타난다. 이 속성들이 함께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성경 본문 중 하나가 바로 출애굽기 34:6–7이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 앞에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는 장면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자비와 정의가 모두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것을 본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인자가 풍성하신” 분이다. 동시에 하나님은 “죄 있는 자를 결코 무죄하게 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여기에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자비란 원래 받아야 할 형벌을 면제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정의롭기만 하고 자비가 없으시다면 어떨까? 그런 하나님은 선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자베르 경감처럼 냉혹하게 정의만 추구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자비롭기만 하고 정의롭지 않으시다면 어떨까? 하나님이 악을 그냥 지나치신다면 역시 선하신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런 하나님은 악이 번성하도록 방치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의 해결은 하나님의 구속 이야기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발견된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오셔서, 순전한 사랑으로 우리 죄의 형벌을 친히 담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18).
이것이 성경의 구속 이야기 중심에 있는 복음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는 십자가에서 만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용서의 선물은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십자가의 그늘 아래 나타난 정의와 자비
십자가는 이 세상의 악과 불의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해결책이다. 갈보리 십자가는 이 목표를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이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은 최종 심판을 미루고 계신다. 하나님은 악과 불의가 계속될 것을 충분히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을 지연시키시는 것은 악에 대해 무력하시기 때문도 아니고, 그 피해자들에 대한 긍휼이 부족하시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 심판을 미루고 계신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베드로후서 3:9)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심판주로 오실 것이다. 그날에는 완전한 정의가 시행될 것이다. 악은 처벌받고, 상처는 치유되며, 눈물은 씻겨질 것이고, 세상은 다시 바로 세워질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들이 펼쳐질 것이다. 그 가운데 한 권에는 우리가 행한 모든 일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의 완전한 도덕적 기준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숨겨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의를 피할 길은 없다.
그러나 자비롭게도 또 다른 책이 있다. 바로 생명책(Book of Life)이다.
그 책에도 기록이 있다. 비록 죄인이지만 자비를 구함으로 용서를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어떻게 가능한가? 그들의 율법 위반에 대한 형벌이 이미 십자가에서 지불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남자와 여자, 흑인과 백인,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이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의 구분만이 남게 될 것이다. 자비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자”와 그렇지 않은 교만한 자의 구분이다.
정의와 자비 위에 세워진 문화
유대-기독교 세계관의 깊은 영향을 받은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은 비교적 정의로운 사회가 가진 독특한 유산을 종종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는 인간이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범죄 혐의를 받은 사람도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을 권리가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비교적 정의로운 사회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회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떤 사회는 다른 사회보다 더 정의로울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사회의 특징은 무엇일까?
법치주의에 대한 존중
정의로운 사회는 자신들보다 높은 도덕법과 최고 입법자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한다. 심지어 가장 강력한 권력자도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독립선언서 첫 문장에서 이를 인정했다.
“자연의 법칙과 자연의 하나님(Laws of Nature and of Nature’s God)이 그들에게 부여한 권리에 따라...”
정의로운 사회는 법치(rule of law) 위에 세워진다. 법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과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조차 법 아래 있으며, 법을 따라야 한다.
인간 존엄성과 하나님이 주신 권리
정의로운 사회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진리 위에 세워진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동등한 존엄성과 가치, 그리고 빼앗길 수 없는 권리를 가진다.
독립선언서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불의는 특정 집단이 비인간화될 때 발생한다. 초기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흑인 노예를 완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태아 또한 그러한 취급을 받고 있다.
부패를 견제하는 사회
어떤 나라든 가장 큰 폐해 중 하나는 부패, 곧 개인적(대개는 금전적)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다.
국제 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의 부패인식지수에 따르면,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부패 수준이 가장 낮은 나라들이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형성된 국가들이었다. 반면 이러한 기반이 없는 국가들은 전문가들과 기업인들의 평가에 의하면 공공 부문의 부패 수준이 더 높은 경향을 보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는 공동체가 함께 숭배하는 신(神) 또는 신들의 모습을 닮아 형성된다. 만일 그 신들이 이기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고, 특별한 대우를 받기 위해 뇌물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면, 그 문화 역시 높은 수준의 뇌물 수수와 부패를 따르게 된다.
그러나 그 문화가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는”(시편 45:7)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형성되고, 또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는”(신명기 10:17) 하나님을 섬긴다면, 부패는 크게 억제될 것이다.
적법 절차의 확립
적법 절차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고인에게 마땅히 보장되어야 하는 존중의 원칙을 말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권리들이 포함된다.
- 공정한 판사와 배심원에 의한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
- 여러 증인과 증거를 통해 유죄가 입증되기 전까지 무죄로 추정받을 권리
-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를 알 권리
- 고발자와 대면하고 반대 증인을 심문할 권리
-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
- 증인을 부르는 것을 포함하여 스스로를 변호할 권리
적법 절차 역시 유대-기독교 문명에서 나온 중요한 열매이다.
그 성경적 뿌리는 신명기 19:15에 있다.
“한 증인만으로는 누구의 죄악이나 허물을 확정할 수 없고 두세 증인의 증언으로 확정할 것이니라.”
또한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를 외모로 보지 않고 심판하시는 분”(베드로전서 1:17)이다.
최종 심판을 하나님께 맡김
정의로운 사회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모든 잘못이 이 땅에서 바로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들은 궁극적인 정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완전하게 집행하실 수 있으며(요한복음 5:22), 마지막 결산의 날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최후의 심판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종종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치부한다. 그들은 양과 염소를 가르실 궁극적 심판주를 믿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한 정의를 실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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