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HOW SHOULD WE THEN LIVE?)
말콤 머거리지(Malcolm Muggeridge)는 그의 책 Something Beautiful for God(하나님을 위한 아름다운 헌신)에서 가난한 자들의 선교사였던 마더 테레사와의 텔레비전 인터뷰를 회상한다. 그는 영국과 전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의 생각을 반영하는 질문을 던졌다.
“인도에는 이미 사람이 너무 많지 않은가? 방치와 영양실조, 또는 관련 질병으로 죽을 수도 있는 버려진 아이 몇 명을 구하는 일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인가?”
머거리지에 따르면, “[그 질문은] 마더 테레사의 삶의 관점과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어서 그녀는 이해하기조차 어려워했다.” 그녀에게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은 숲에 블루벨 꽃이 너무 많다거나 하늘에 별이 너무 많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더 테레사는 수정되는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모든 인간 생명은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살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어떤 인종·계급·신조·장애를 가졌든 우리 모두를 깊이 사랑하신다.
이 진리가 스며드는 사회에서는 노예제가 폐지되고, 여성과 아이들의 지위와 처우가 개선되며, 태아와 죽어가는 이들이 돌봄을 받고, 가난하고 상처 입고 소외된 사람들이 섬김을 받는다.
초기 기독교의 특징을 연구한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기독교가 무엇보다도 잔혹함으로 가득한 세상에 새로운 인간관을 가져왔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가 개종자들에게 준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인간성이었다.”
초기 사람들이 기독교로 이끌린 이유는 더 나은 인간관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진리를 말하고 실천했으며, 그것은 특히 여성들과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빛으로 끌려가는 나방처럼 끌어당겼다. 교회는 가장 좋은 모습일 때, 이 강력하고 변혁적인 진리를 세대마다 충실히 선포하고 옹호한다.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시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비인격체(human non-person)”라는 비참한 개념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곧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기초한 기독교적 인격 개념(personhood)의 엄청난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가치 있는 존재됨을 스스로 획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존엄은 본질적(intrinsic)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아시며,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해야 할 것이다. 라이언 앤더슨(Ryan Anderson)은 이렇게 말한다.
“나쁜 철학은 좋은 철학으로 대답해야 한다. 나쁜 과학은 좋은 과학으로 응답해야 한다. … 이것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반대자들보다 두 배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들의 논리를 그들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를 이성의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낙태 옹호자들의 입장이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문화적 가치인 포용(inclusion)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낙태는 포용적이지 않고 배제적이다. 낙태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다. 그들은 인격체로서의 권리를 가질 자격이 없다.”
왜 개인의 선택과 자율성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부드럽게 되묻지 않는가? 인간을 열등하게 보는 관점의 옹호자들은 이런 말을 좋아한다.
“낙태가 싫으면 하지 마라.”
“조력 자살이 싫으면 하지 마라.”
“동성 결혼이 싫으면 하지 마라.”
그러나 이런 문제들이 단지 개인의 사적인 선택에 불과한가? 아니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처럼, 이런 것들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것들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어떤 사회가 될지를 규정한다. 다른 문제들에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여 이 점을 이웃들이 보게 하자.
“살인이 싫은가? 그렇다면 아무도 죽이지 마라.”
“노예제가 싫은가? 그렇다면 노예를 소유하지 마라.”
사람들은 이런 억지 주장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들은 우리 공동 사회와 공동체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권리와 존엄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그들이 보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단지 사람들의 생각만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얻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자. 우리는 반대자들도 하나님께 사랑받는 인간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므로 존중받아야 할 존재로 여겨야 한다.
“주의 종은 다투지 말아야 하며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한다. … 반대하는 사람들을 온유하게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아는 데 이르게 하실지도 모른다”(디모데후서 2:24–25).
또한 우리는 낙태의 많은 희생자들, 특히 삶이 산산이 부서진 수많은 여성들을 따뜻하게 돌봄으로써 이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 안에 용서와 사랑의 돌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미국에서 위기 임신 센터(crisis pregnancy center)가 낙태 시설보다 4천 대 7백으로 더 많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 아닌가?
또한 우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들”(에베소서 5:11)을 드러내야 한다. 악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번성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일 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의학진보센터(Center for Medical Progress) 외에도, 다른 용감한 그리스도인들이 낙태의 악을 폭로하는 빛을 비추어 왔다. 릴라 로즈(Lila Rose)와 라이브액션 네트워크(LiveAction Network), 피닉스의 Voices for the Voiceless(소리 없는 자들의 소리), 그리고 라이언 봄버거(Ryan Bomberger)의 Radiance Foundation(빛 재단) 등이 그 예다.
이 모든 일들 때문에 낙태에 대한 흐름은 바뀌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이자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의 학자인 앤더슨은 그 변화를 이렇게 강렬하게 묘사했다.
“1973년 2월, Roe v. Wade 판결 직후의 친생명 운동가들을 생각해 보라. 여론은 2대 1의 비율로 그들에게 반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친생명 공적 인물들—테드 케네디, 제시 잭슨, 앨 고어, 빌 클린턴—이 낙태 요구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돌아섰다. 언론은 젊은 세대 모두가 낙태 권리를 지지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엘리트들은 친생명 운동가들을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선 사람들로 조롱했다. 친생명 운동가들은 늙어가고 있었고, 그들의 자녀 세대는 점점 더 그들을 반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용감한 친생명 운동가들은 쟁기를 붙잡고 계속 나아갔고, 오늘날 우리는 그 열매를 거두고 있다.
“우리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더 친생명적이다. 오늘날 미국인들의 다수는 자신을 낙태반대자로 규정하며, 이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높다. 지난 10년 동안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주 법률들은 이전 30년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많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학자들은 생명을 위한 과학적·철학적 논거를 담은 책과 논문들을 썼다. 헨리 하이드(Henry Hyde), 에드 미스(Ed Meese),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같은 정치가들은 정책을 만들고 영향력을 사용해 생명 문화를 증진시켰다. 활동가들과 변호사들은 함께 연대했고, 연합체가 만들어졌으며 전략이 세워졌다. 진리를 향한 증언이 태어났다.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도 깨어났다. 우리가 종종 잊지만, 당시 남침례교(Southern Baptists)는 낙태 권리를 지지했고 Roe 판결을 지지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은 생명 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다.
앤더슨은 친생명 운동 안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일이 있다”고 말한다. 예술가와 음악가들, 목회자와 신학자들, 정치가와 변호사들, 학자와 활동가들을 위한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우리의 목표는 문화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우리의 견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들의 선을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치명적인 거짓말이 등장할 때, 우리는 사랑 때문에 행동해야 한다. 수동적으로 앉아서 “그냥 따라가며 적당히 지내는 것”은 안 된다. 우리는 그 거짓에 맞서고, 생명을 확언하는 진리를 분명히 말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이 믿어 온 물질주의적이고 포스트모던한 인간 생명의 재정의가 얼마나 축소적이고 비인간적이며 결국 살아갈 수 없는 것인지를 보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 맞지 않으며 현실 세계와도 맞지 않는다.
교회는 각 세대마다 자신의 신념에 대한 용기를 가지고 그 불꽃을 계속 지켜야 한다. 앤더슨은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을 위한 용기와 힘을 얻고, 우리의 삶의 소명을 이루려는 희망을 가지는 유일한 길은, 우리를 그 소명으로 부르신 분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다.”
역사는 맹목적인 힘이 아니다. 우리는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다. 역사는 당신과 나 같은 사람들의 행동, 곧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 의해 형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를 심판할 것은 역사가 아니다. 우리는 역사의 주님께 심판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주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역사의 가장 큰 악을 뒤집으셨다.
마더 테레사는 옳았다. 결국 우리는 가장 연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돌보았는지에 따라 심판받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하늘 아버지를 얼마나 닮았는지에 따라 평가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시는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편 68:5).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시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실 것이다. 그는 약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궁핍한 자들의 생명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그들의 생명은 그의 눈에 귀하다”(시편 72:12–14).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때 가장 강력한 변증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약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돌보느냐가 될 것이다.
당신의 삶과 영향력의 범위 안에서 보이지 않고 잊혀진 사람들은 누구인가? 태아와 영아들, 노인들과 임종을 앞둔 사람들, 병든 자들, 외롭고 고립된 사람들, 난민과 이방인들인가? 그들은 당신의 집 안에 있을 수도 있고, 바로 옆집에, 혹은 길 건너편에 있을 수도 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라.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기억하라.
“우리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든지, 혹은 그 사람이 어떤 도덕적 문제로 씨름하고 있든지, 그들의 가장 첫 번째 필요는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영원까지 이어지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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