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세상을 치유하는 10가지 단어

2. 인간(Human)-2

lamp365 2026. 5. 17. 14:50

인간다운 문화 (A HUMANE CULTURE)

인간 생명에 대한 이러한 진리들이 한 문화를 형성할 때, 그 결과는 혁명적이었다. 인간 생명에 대한 진리 위에 세워진 문화는 계층, 민족, 성별, 정신적·육체적 상태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보호한다. 그들은 태아에서부터 자연적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생명을 돌보고 보호하며, 특히 가장 약하고 취약한 사람들―태아, 노인, 중병 환자, 과부, 노숙자, 죄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본다. 머거리지(Muggeridge)의 말처럼, “우리 안의 이 생명은 … 아무리 희미하게 깜빡이든, 혹은 맹렬히 타오르든, 사람이 감히 꺼뜨려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불꽃이다. 그 동기가 아무리 인간적이거나 계몽된 것처럼 보일지라도.”⁶

이러한 문화 속에서는 병원과 호스피스가 세워지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한 수많은 노력이 이루어진다. 로마 제국을 휩쓴 두 번째 대역병이 절정에 이르렀던 서기 260년경, 디오니시우스(Dionysius)라는 인물은 다른 이들을 돌보다 생명을 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웅적인 간호 활동을 기리는 글을 남겼다.

“우리 형제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한없는 사랑과 충성심을 보이며 자신을 아끼지 않고 오직 서로만을 생각했다. 위험을 개의치 않고 그들은 병든 자들을 돌보며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고 그리스도 안에서 섬겼다 … 그들은 이웃의 병을 자신에게 옮겨 받으면서도 기꺼이 그들의 고통을 받아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간호하고 돌보다가 그들의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죽었다.”⁷

 

이러한 문화에서는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만 돌봄을 받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특별한 선물이자 축복으로 환영받는다. 크리살리스 재단(Chrysalis Foundation)의 대표 엘리자베스 유먼스(Elizabeth Youmans)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아이는 하나의 약속이다―이름이 있고, 열정이 있고, 이야기가 있으며,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아이는 독특하다. 평범한 아이는 없다!”⁸

이러한 문화는 어린이와 청년들의 양육과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은 어머니 됨과 아버지 됨을 소중히 여긴다. 교육이 교회의 위대한 유산의 일부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하버드, 예일, 옥스퍼드, 베이징대학교를 비롯한 세계의 중요한 학교들 중 많은 곳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러한 문화는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소중히 여긴다. 반대로 어떤 문화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해로운 거짓말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생명을 파괴하고 빈곤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세계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 선택 낙태, 유기, 영아 살해를 통해 체계적으로 희생되는 경우가 많다.⁹ 반면, 여자아이와 여성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을 교육하며,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을 감당하도록 준비시키고, 남성과의 독특하면서도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존중하는 문화는 번영하는 문화이다.

이러한 문화는 각 사람의 독특함과 개별성을 존중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관계들―하나님과의 관계, 가족,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들은 개인을 국가나 특정 사회 집단에 종속시키지 않으며, 사람들을 단지 정체성 집단의 대변자로 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을 완전히 자율적인 개인으로 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모든 인간 존재의 고유한 중요성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관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러한 문화는 사람들을 귀중한 자산, 곧 역사를 만들어 가는 존재로 본다. 그들의 삶은 영원히 이어질 파장을 만들어 낸다.

 

인간 생명에 대한 진리 위에 세워진 문화는 인간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분께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집단의 소유물이나 노예로 태어난 것이 아님을 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자유의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아무리 강력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빼앗을 수 없다. 이러한 문화는 하나님이 주신 권리들을 보호하고 존중하며, 특히 하나님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를 소중히 여긴다.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는 또한 노동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사용해 세상을 독특하게 축복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단지 먹이고 보호해야 할 애완동물이나 가축처럼 취급하지 않는다. 정직한 노동을 통해 얻는 기쁨과 존엄성을 빼앗는 의존 구조를 조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 나라의 부가 국민들의 창의성과 혁신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인간이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고, 언어를 통해 책과 시와 음악을 만들며, 모래를 사용해 마이크로프로세서와 광섬유를 제작할 때 부가 창출된다는 것을 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독특한 능력으로 세상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번영하고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문화를 가진 사회는 인간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정부 정책과 교육, 경제 시스템을 발전시킨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문화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 곧 이기적 야망과 교만을 고려한다. 그들은 인간의 악을 최소화하기 위해 권력을 분산시키는 정부를 만든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악의 가능성이 존재함을 인정한다. 그들은 세상을 선한 “부족”과 악한 “부족”으로 나누지 않는다. 만약 유대인이나 여성이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무슬림이나 그리스도인을 제거하거나 주변화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모든 것이 완전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유토피아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진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더 인간다운 가정과 공동체와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

인간의 재정의 (HUMAN REDEFINED)

오늘날 “인간”에 대한 이러한 오래된 성경적 정의는 문화 권력의 중심에서 크게 대체되었다. 인간 생명의 재정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정표는 1859년 11월 24일, 영국의 자연주의자 찰스 다윈이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출간했을 때 일어났다. 다윈은 인간 생명이 하나님의 의도적인 창조물이 아니라, “자연선택”이라고 불리는 방향 없는 과정의 무목적적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다윈은 자연선택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유지하시는 섭리가 아니라 모든 식물과 동물 생명, 인간 생명의 기원과 발전을 설명한다고 믿었다. 다윈의 이론이 학계와 더 넓은 문화 속에서 신뢰를 얻으면서, 세속주의는 유대-기독교 세계관을 대신하여 서구를 형성하는 지배적 세계관이 되었다. 오늘날 다윈의 이론은 전 세계 아이들에게 의심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처럼 가르쳐지고 있다.

 

다윈 이후 인간 생명은 거의 모든 의미를 박탈당했다. 우리는 더 이상 선하신 창조주의 피조물로 여겨지지 않는다.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은 서로 무작위로 상호작용하는 비인격적 물질 입자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비인격적 우주의 우연한 사고이며, 단지 물질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해진다. 이 새로운 신념 체계는 죽음 이후의 생명은 없으며, 우리는 단지 원인과 결과로 움직이는 물질 세계의 “기계” 속 부품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세계관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비인격적 힘과 화학 작용의 결과라고 말한다.

 

   인간의 재정의 (HUMAN REDEFINED)

  1. 목적 없는 물질, 진화 과정의 산물인 동물적 생명체, 곧 생물학적 기계.
  2. 철저히 자율적이고 의지를 가진 존재. 독립적이며 자기결정적인 행위자.
  3. 사회적·역사적으로 규정된 존재, 특정 문화나 정체성 집단을 대표하는 존재.

이 세계관은 우리가 더 이상 책임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누구에게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도덕적 책임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본질적인 존엄, 가치, 권리를 지니지 않았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사명도, 다스림도, 창조 세계를 향한 책임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단지 살아남아 우리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더 이상 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는 동물 세계를 내려다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동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동물윤리단체 PETA(People for the Ethical Treatment of Animals)의 공동설립자 잉그리드 뉴커크(Ingrid Newkirk)는 이렇게 말했다. “쥐는 돼지이고, 개는 소년이다.”¹⁰ 그러나 동물 세계에는 윤리적 고려가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은 선택의 자유나 도덕적 사고가 아니라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 오직 하나의 법칙만 존재한다. 적자생존이다. 우리는 창조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삶과 죽음의 경쟁 속 플레이어에 불과한 존재로 여겨진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우울한 이야기다. 또한 실제로 살아낼 수 없는 세계관이기도 하다. 그래서 거의 아무도 인간 생명에 대한 이런 정의가 사실인 것처럼 살지 않는다. 부모들이 자녀를 생화학적 기계나 가축처럼 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코펜하겐 동물원은 1996년에 우리에 갇힌 한 쌍의 넘녀를 전시하면서 의도치 않게 이 점을 증명했다. 동물원 관계자 피터 베스터가르드(Peter Vestergaard)는 이 전시의 목적이 방문객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기원을 직면하게 하고 “우리는 모두 영장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¹¹ 비샬 망갈와디(Vishal Mangalwadi)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방문객들은 다른 털 많은 영장류들이 천장을 바라보고, 쇠창살에 매달리고, 서로의 털에서 이를 잡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 안의 인간인 헨릭 레만과 말레네 보토프트는 오토바이를 손보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책을 읽고, 에어컨을 조절했다. 몇 주 후 두 사람은 원숭이 집을 떠났다. 이 실험은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존엄성을 침해했다.”¹²

 

비슷한 방식으로, 서구 사회는 다윈주의 철학의 가장 비인간적인 요소들로부터 멀어지려 해왔다. 문화 속에서 인권과 인간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다윈주의자들은 인간성에 대한 성경적 정의에서 개념들을 “빌려온다.” 예를 들어 무신론 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원리에서 보편적 인권 개념이 기독교를 통해 생겨났음을 인정한다. 로티는 자신 역시 인권 개념을 기독교에서 빌려온다고 인정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무임승차하는 무신론자(freeloading atheist)”라고 불렀다.¹³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는 정직했다.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생각이 오랜 세월 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거의 모든 사회는 어느 시점에든 어떤 형태로든 노예제도를 시행했다. 대부분의 사회는 한때 여성들을 성적 대상이나 단지 아이를 낳는 수단으로 취급했다. 많은 문화에서 아이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여겨졌다. 원치 않는 아기들은 밖에 버려져 죽도록 방치되곤 했다. 장애인이나 병약한 사람들은 스스로 살아남도록 버려졌다. 노인들은 단지 먹여야 할 부담으로 간주되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들을 자명한 것으로 여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고, 그 권리 가운데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권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체성과 기본적 인권에 대한 초월적 진리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지 않는다면, 인권은 단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사회적 구성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고 권력자들이 불편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다.

 

인권은 자연주의나 다원주의나 상대주의 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변하지 않는 진리―모든 인간은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동등한 가치와 존엄을 가진 존재라는 진리(창세기 1:26-27)―위에 기초한다. 모든 개인의 가치에 대한 이러한 진리 주장은 수세기에 걸쳐 발전되었고, 그것은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로 하여금 영국의 노예무역 폐지에 헌신하게 했고, 19세기 미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에 힘을 주었으며,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로 하여금 다음 날을 바라보게 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 흑인과 백인, 유대인과 이방인, 개신교인과 가톨릭교인이 손을 맞잡고 옛 흑인 영가의 가사대로 노래하게 될 날 말입니다. ‘마침내 자유다! 마침내 자유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우리는 마침내 자유다!’”¹⁴

 

1948년 국제연합 총회에서 선포된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은 이러한 성경적 강조를 반영한다(비록 하나님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¹⁵ ¹⁶ 이 선언은 “인류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지닌 고유한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한다. 또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고 선언한다. 노예제와 고문을 금지하며, 무죄추정 원칙을 포함한 법 앞의 평등을 강조한다. 결혼할 권리와 재산 소유권을 인정하며, 사상·양심·종교의 자유를 지지하고, 결사의 자유와 의견 표현의 자유를 보호한다. 이 모든 자유는 우리 각자가 창조주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변하지 않는 성경적 진리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의 인권을 부정하는 것은 그들의 인간성 자체에 도전하는 것이다.”¹⁷
사람들에게 인권을 부여하는 것은 곧 그들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 인간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는 성경적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문화의 지배적인 목소리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붙들려 한다. 그들은 한편으로 인간은 본질적 존엄과 가치가 없는 우주의 우연한 사고라고 하는 다윈주의적 현실관을 받아들인다. 동시에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문화 비평가 로드 드레허(Rod Dreher)는 이러한 새로운 인간 이해의 후반부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자연이나 하나님이나 과거나 미래에 아무 빚도 지지 않는 자율적이고 의지를 가진 존재라고 생각한다.”¹⁸

한편 하버드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오늘날 지배적인 인간 개념을 “짐 없는 자아(the unencumbered self)”라고 설명한다. 즉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도덕적·시민적 관계들에 의해 얽매이지 않는 자아”라는 뜻이다.¹⁹

만약 우리가 단지 동물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식욕과 충동과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간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신”이라면, 우리의 욕망과 선택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회사 교수 칼 트루먼(Carl Trueman)은 이렇게 말한다.

“후기 현대의 자아는 기본적으로 자기결정적인 행위자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 욕망은 다른 자기결정적 존재의 욕망과 관계를 맺을 때에도 오직 ‘동의(consent)’라는 원칙에 의해서만 제한된다.”²⁰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과 함께 인간의 선택과 욕망은 객관적 현실보다 더 높은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는 이렇게 설명한다.
“주권적 자아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어떤 것에 의해 자신의 선택권이 제한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몸조차도.”²¹

BBC는 자신을 논바이너리(non-binary)라고 규정하는 한 젊은 여성을 소개했는데, 그녀는 이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당신이 어떤 살아 있는 고기 골격 안에 태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을 규정하는 것은 당신이 느끼는 것이에요.”²²

이것은 인간 이해에 적용된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당신은 당신의 감정으로 정의된다. 현실은 오직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당신의 진정한 자아는 당신의 생물학이나 신체 구조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것은 사실상 고대 영지주의(Gnosticism)의 새로운 형태이다.

 

마이클 노박(Michael Novak)은 이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를 누구보다 잘 포착했다.

“인간을 영혼 없는 존재로 보는 사람들에게 … 지속적인 선이나 영원한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남아 있지 않다. 결국 남는 것은 사라져 가는 욕망들뿐이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변하는 의지의 행동들로 축소된다. 개인은 내면의 공허함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또 하나의 오락을 추구할 뿐이다.”²³

오늘날 서구 세계에서는 신물질주의(materialism) 대신 신마르크스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적 세계관이 되었다. 물질주의가 인간을 단지 생물학으로 환원시킨다면, 포스트모던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을 사회학으로 환원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이 전적으로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생각은 문화적 힘들에 의해 꿰매어진 사회적 구성물일 뿐이다.

낸시 피어시는 그녀의 책 『Finding Truth』에서 이러한 포스트모던 신마르크스주의 인간관을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사람의 생각은 … 문화적 힘들에 의해 꿰매어진 사회적 구성물일 뿐이다. 개인은 인종, 계급, 젠더, 민족성, 성적 정체성에 기반한 공동체들의 대변자에 지나지 않는다.”²⁴

인간의 개별성, 자유, 의지는 이 급진적으로 비인간화된 인간관의 희생양이 되었다.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의 말처럼, 그것은 “개인을 사회적 힘의 꼭두각시로 축소시키며 … 사람들이 속한 공동체를 넘어설 수 없게 만든다.”²⁵

 

당신을 독특한 개인으로 만드는 것들―당신의 개인적인 역사, 삶의 경험, 선택들, 그리고 깊이 붙들고 있는 신념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유일한 것은 당신이 속한 집단이다.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거짓된 관점은 연합의 기초가 없기 때문에 오직 분열만 만들어 낼 뿐이다. 그것은 우리를 끝없는 권력 투쟁 속에서 서로 대립하는 경쟁적 부족들로 갈라놓을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에 대한 이러한 포스트모던 신마르크스주의 관점과 한 가지 점에서는 동의할 수 있다. 인간은 집단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성경은 우리가 단지 개인이 아니라 관계를 위해 지음 받은 사회적 존재라고 말한다. 성경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세기 2:18)라고 말한다. 우리는 가족, 교회, 민족과 같은 집단의 일부이며, 이러한 공동체는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공유된 언어, 가치관, 습관, 역사 속에서 이러한 집단들 안으로 문화화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인간의 정체성이 집단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단호히 부인한다. 우리가 속한 집단은 우리를 형성(shape)할 수는 있지만, 우리를 정의(define)하지는 않는다.

 

성경적 인간 이해는 풍성하고, 다면적이며, 총체적이다. 반대로 인간 생명에 대한 여러 재정의들은 일차원적이며 환원주의적이다. 우리가 인간됨의 의미를 재정의할 때―곧 인간 생명을 축소하고 그 가치를 떨어뜨릴 때―그 결과는 파괴적이다. 1800년대 후반,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간 생명에 대한 재정의를 촉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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