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세상을 치유하는 10가지 단어

2. 인간(HUMAN)-1

lamp365 2026. 5. 16. 21:20

내가 주의 깊게 살피는 주의 하늘과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달과 별들을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주께서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양과 소와 들의 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편 8:3–8 


인간(HUMAN)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육체적이며 영적인 존재로서, 본질적인 존엄성과 헤아릴 수 없는 가치, 그리고 생명과 자유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지닌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해, 또한 서로 간의 관계를 위해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창조 세계를 지혜롭게 관리하고 다스리도록 만드셨으며, 인간은 이 사명을 어떻게 수행하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진다.

 

재정의된 인간(HUMAN REDEFINED)

  1. 목적 없는 물질, 진화 과정의 산물인 하나의 동물적 생명체, 곧 생물학적 기계
  2. 철저히 자율적이고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존재, 독립적이며 스스로 결정하는 행위자
  3. 특정 문화나 정체성 집단을 대표하는, 사회적·역사적으로 규정된 존재

하나님의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은 루이자 디아스(Luiza Diaz)는 브라질 벨렘의 고향을 떠나 먼지 가득한 모리타니의 누악쇼트로 갔다. 어느 날 그녀는 길 위에 버려진 한 여자아기를 발견했다. 그 아이는 힘 없이 울고 있었고, 병들고 영양실조 상태였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아이 곁에는 할머니가 구걸할 때 아이를 동정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심하게 그 곁은 지나갔다. 루이자는 아이와 할머니 앞에 멈추어 섰다.  바로 그날 두 세계관이 충돌했고 루이자의 삶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루이자는 아기에게 물을 먹이며 엄마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엄마는 다른 아이들을 돌보러 갔어요. 의사도, 주술도 이 아이를 낫게 하지 못했어요”라고 대답했다.

루이자가 아이를 자기 팔로 안으려고 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아랍어로 조용히 말했다.
“이 아이가 죽는 것이 알라의 뜻입니다.”

그 말에 루이자는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다.
“아니에요. 이 아이가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루이자는 할머니에게 아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지 않으면 여자 교도소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결국 그 여인은 순종했고, 아이의 엄마도 와서 아이를 돕겠다고 했다. 마침내 루이자는 미혼 여성이지만 법적으로 그 아이를 입양했다.  아이의 이름을 “고귀한”, “존귀한”이라는 뜻의 알레아(Aleah)로 바꾸었다.


지금 알레아와 그녀의 자매 아미나(“정직한”, “신뢰할 만한”이라는 뜻)는 건강하고 아름답고 경건한 십대 소녀들로 자라났다. 아미나 역시 여자 교도소에서 아기 때 입양된 아이였다. 이들은 프랑스 남부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일하며, 모로코에서 유럽의 성노예 시장으로 팔려온 십대 소녀들을 구조하고 있다.

 

인간의 정의(HUMAN DEFINED)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깊이 형성한다. 이것은 문화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문화가 “인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정책과 법, 그리고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나며, 때로는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결과를 가져온다.

가장 근본적으로 인간은 피조물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시편 139:13–14).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렇기에 의존적 존재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의지한다(사도행전 17:25). 우리의 모든 날은 하나님께서 정하셨고,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나이다”(시편 139:16).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은 선물이자 청지기 직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물이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신 후 자신의 작품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창세기 1:31)라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세계를 사랑하시며, 특별히 그 절정인 인간을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너희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누가복음 12:7)라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하나님께 인간은 소중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잉태의 순간부터 마지막 숨까지 깊은 존엄성과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며, 특별히 가장 약하고 연약한 사람들과 자신을 연결하신다. 우리가 과부와 죄수, 굶주린 자와 헐벗은 자를 돌볼 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

인간은 물론 하나님이 만드신 수많은 피조물 가운데 하나이며, 동물과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고, 번식하며, 먹고 자고 숨 쉬고 생존 본능을 지닌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독특하게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지으셨지만,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창세기 2:7). 우리는 육체를 가진 영적 존재이며,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존재이다. 우리의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 시작되지만,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원까지 이어진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요한복음 4:24),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것은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물질적 속성을 닮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이시며 우리도 그렇다. 하나님은 생각하시고 느끼시고 성찰하시며,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도덕적 존재이시며 우리도 그렇다. 하나님은 말씀과 언어를 사용하시며, 우리 역시 그렇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 또한 일하고 창조하도록 지음 받았다. 하나님은 뜻을 가지신 분이며 우리도 그렇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왕으로 다스리시며, 우리에게도 맡겨진 영역과 통치가 있다.

 

우리가 이러한 속성을 하나님과 공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창조주와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으며, 또한 서로와도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창조되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주께서 우리를 주님 자신을 위해 만드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은 주 안에서 안식하기까지 쉼이 없습니다.”

이러한 속성들은 우리를 다른 피조물과 구별한다. 우리는 피조물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다.

우리의 영적 본성은 우리로 하여금 창조 세계를 초월하게 한다. 우리는 기계적인 인과율의 우주에 갇혀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역사의 흐름을 형성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달라스 윌라드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사건과 사물들을 급진적이고 독창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우리 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급진적 창조성이 인간을 절대적으로 독특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하나님은 공동체이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로서 공동체를 이루도록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한 남자만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사실 두 남자나 두 여자만으로도 마찬가지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남성과 여성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동일한 존엄성과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모든 인간은 하나의 인간성을 공유하며 평등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우리는 공통된 인간 본성을 가졌지만 놀라운 다양성을 드러낸다. 우리의 성격과 외모, 재능과 민족성과 성별은 이러한 다양성을 보여준다. 특별히 남성과 여성의 다양성은 중요하다.

이 다양성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의도 안에 있는 것이므로 기뻐해야 한다.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대로 살아가게 한다.

인간의 평등성과 독특성이라는 두 진리는 건강한 인간 공동체의 기초를 제공한다. 다양성 없는 일치는 획일성과 개인성의 상실을 가져오고, 일치 없는 다양성은 갈등과 편견을 낳는다.

오직 성경적인 균형만이 인간의 번영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 안에 있는 이 일치와 다양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 하나님은 본질상 하나이시면서도 동시에 성부·성자·성령의 세 위격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을 목적을 위해 창조하셨다. 남자와 여자는 창조 세계를 다스리도록, 곧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대리 통치자로 부름 받았다. 창세기 1:27–28은 인간의 기본 사명을 이렇게 설명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세기 2:15은 같은 사명을 다른 강조점으로 표현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재능과 은사를 주셨다. 창조적인 정신과 말과 언어, 손과 눈과 발을 포함한 귀한 몸을 주셔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일하도록”(그리고 쉬도록도) 만드셨다.

일은 인간 존엄성의 핵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복을 사용해 하나님의 동산을 돌보고 확장하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는 우리가 발견했을 때보다 더 아름답고 풍성하며 번영한 세상으로 남겨야 한다.

신학자 제임스 K. A. 스미스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은 창조를 존재하게 하시며 그것이 ‘심히 좋다’고 선언하셨지만, 그것이 완성되었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창조는 학교나 미술관이나 농장이 이미 완성된 상태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들에 의해 펼쳐지고 발전되어야 한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특별한 사명과 부르심을 주셨다고 가르친다(누가복음 19:11–26; 에베소서 2:10).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필요한 은사와 재능도 함께 주셨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삶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한다.

창세기 2:19은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적 통치를 아름답게 보여 준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동물을 창조하셨고, 자신의 동역자이자 대리 통치자인 아담을 초대하여 창의성을 발휘하고 이름을 붙이게 하셨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담이 붙인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인간”을 정의할 때, 우리는 또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습 그대로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고, 사랑에는 선택의 자유가 포함된다. 사랑은 강요될 수 없다.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거부했고, 그 이후 우리는 계속 고통을 겪어 왔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죄가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12). 그 첫 번째 반역 행위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다.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인간관계도 손상되었다. 이것이 세상이 불신, 학대,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러한 창조주에 대한 우주적 반역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 형상은 왜곡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창조적이지만, 이제는 그 창조성을 파괴를 위해 사용한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지만, 이제는 우상을 사랑하며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한다”(로마서 1:25). 우리의 깨어진 상태 속에서 우리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존재로 태어난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악이 우리 안에서 흘러나와 하나님의 선한 세상에 퍼진다. 세상의 악의 근원은 저 바깥의 다른 집단이나 정치 세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기”, 곧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 있다. 솔제니친이 말했듯이,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은 모든 인간의 마음을 가로지른다.”⁵

그러나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 가운데 우리를 반역적이고 타락한 상태에 버려두지 않으셨다. 대신, 하나님은 우리의 깨어진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계획을 시작하셨고, 그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심으로 완성되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 중 한 사람이 되셨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사셨는데, 그것은 아담이 살지 못했던 삶이며 우리 또한 살 수 없는 삶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담당하셨다. 그 후 다시 살아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모든 사람에게 그분의 이름 안에서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를 제공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타락한 우리의 인간성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 우리가 그분을 믿어 구원을 받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점점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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