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세상을 치유하는 10가지 단어

1. 진리 (Truth)-4

lamp365 2026. 5. 16. 00:52

탈진실 문화 (POST-TRUTH CULTURE)

진리가 “탈진실”에 자리를 내주면서 우리는 뒤늦게 깨닫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진리 개념은 인간 활동 거의 모든 영역의 정상적 기능에 핵심적이다.”

객관적 진리에 대한 공유된 이해가 없다면 사회는 문자 그대로 해체된다. 공동 현실에 대한 이해 대신 자기 이익이 우선하게 되면, 최근 금융 위기와 같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학문 세계에서도 정직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한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하버드를 포함한 여러 명문 학교에서 대규모 부정행위가 드러났다.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느 정도 학문적 정직 기준을 위반한다고 한다.

탈진실 문화에서는 학생들만 속이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더 쉽게 거짓말하고 계약을 어기며 다른 사람을 속인다. 이러한 부정직의 증가는 사회를 붙드는 접착제인 신뢰를 무너뜨린다.

진리에 대한 헌신이 사라지면 관계는 깨어지고, 불신과 냉소가 만연하며, 제도들은 흔들린다.

공적으로 공유되는 진리가 없다면, 서로 다른 집단들이 소통하고 연합할 중심점도 사라진다. 사람들은 “정체성 집단” 속으로 숨어 들어가며 서로 대화하기조차 어려워진다. 결과적으로 사회는 분열과 불신, 심지어 증오로 특징지어진다.

객관적 진리가 사라진 자리를 벌거벗은 권력이 채운다. 낸시 피어시는 이렇게 설명한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없다면, 객관적 진리를 주장하는 모든 시도는 단지 한 공동체가 자신들의 제한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려는 시도로 여겨질 것이다.”

 

피터슨은 포스트모던 세계를 “정체성 집단들의 홉스적 전쟁터”라고 묘사한다.

“그들은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아니, 소통할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권력을 위한 투쟁뿐이다.”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그의 책 『불가능한 사람들(Impossible People)』에서 같은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니체는 절대적이거나 객관적인 진리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고, 그것을 “권력을 향한 의지(will to power)”로 대체했다. 그의 프랑스 제자 미셸 푸코는 모든 것을 권력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래서 오늘날 거의 모든 토론에서 권력 문제가 제기된다.
“여기서 진짜 의도는 무엇인가?”
“이 관계 속 권력 구조는 어떻게 되는가?”
“누구의 이익이 보호되고 있는가?”
“누가 피해를 보고 있는가?”

 

서구 문화 엘리트들 사이에 지배적인 포스트모던·신마르크스주의 서사에 따르면, 객관적 진리와 이성, 논리, 증거, 논증 자체가 백인 남성 억압자들이 자신들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억압자들을 뒤집어엎고 문화적 권력과 권위를 장악하기 위해, 학문적 비판이론가들은 “관점 인식론(Standpoint Epistemology)”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간단히 말하면, “진리”에 대한 지식은 신중한 사고나 연구, 이성, 논리, 혹은 연륜과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들의 “억압받은 삶의 경험(lived experience)”이 억압자들보다 더 깊은 통찰을 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는 피해자들이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정의하며, 토론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성과 논리가 버려질 때, 감정과 느낌이 중심 무대에 올라온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토론과 논쟁은 감정적 고통과 상처에 대한 과장된 주장들로 대체된다. 상대를 무너뜨리는 데 필요한 것은 단지 “상처받았다”거나 “심각한 모욕을 당했다”는 주장뿐이다.

공유된 객관적 진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정체성 집단들만 남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은 점점 더 “서사(narrative)”를 만들고 퍼뜨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서사를 진리처럼 판매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결과를 얻기 위해 만들어진 현재 혹은 과거 사건들에 대한 심하게 왜곡된 이야기들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론에 유리한 사실만 강조하고, 불리한 사실들은 무시한다. 어떤 경우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부 내용이나 사건 자체를 완전히 꾸며내기도 한다.

 

이러한 내러티브들은 이성을 우회하고 감정에 호소하도록 만들어져 상상력을 사로잡고 대중을 움직이도록 전달된다. 사람들을 영웅, 악당, 피해자의 역할로 나눈다. 영웅과 피해자는 언제나 정의와 의로움의 편―곧 자기들의 편―에 서 있다. 반대로 악당이나 억압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편에 있으며, 그곳에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한다고 규정된다. 실제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에 더 가까울 수도 있음에도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내러티브의 생산과 확산이 급속히 증가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자신들의 내러티브가 도전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권력 엘리트들은 노골적인 검열은 물론이고 “가짜 뉴스”, “음모론”, “오정보(misinformation)”, “허위정보(disinformation)”, “악의적 정보(malinformation)”라는 비난까지 동원하여 반대 의견을 침묵시키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과거에 편견 없는 사실과 진리 탐구를 기초로 삼았던 모든 제도와 분야가 약화되었다. 여기에는 대학과 역사, 언론, 과학, 법, 정의의 영역이 포함된다. 이 모든 영역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전의 헌장―진리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일―을 버리고, 새로운 목표인 내러티브의 생산과 유지로 대체했다.

 

이 새로운 체제 안에서 정치인, 역사학자, 언론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내러티브를 확산시킨다. 대학들은 점점 더 포스트모던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며 반대되는 견해를 위협하고 침묵시키거나 억압하고 있다.

 

심지어 과학도 예외가 아니다. 이상적으로 과학자들은 증거가 이끄는 곳을 따라가야 하지만, 점점 더 많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데이터와 연구 결과를 조작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있다.

 

법과 정의의 영역에서도 판사들은 점점 헌법으로부터 분리되어 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강력한 지위를 이용해 법률 문서들을 자신들의 해석대로 적용하여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정의 체계의 기반인 적법 절차는 판사, 변호사, 증인들이 더 이상 진리에 대한 충성심을 느끼지 않고 거짓말하거나 사실을 왜곡할 때 존속할 수 없다. 요컨대 우리는 더 이상 법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강한 자의 지배 아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어깨를 으쓱하며,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진리를 알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전과 왜곡, 거짓 내러티브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데이터와 증거와 연구 결과는 의심받는다. 누구도 신뢰할 수 없다.

 

《하버드 비즈니스 저널》은 2017년에 대중이 정부, 기업, 언론, 비영리 단체 지도자들이 “옳은 일을 할 것”이라고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지도력에 대한 신뢰의 엄청난 붕괴”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버릴 때 너무나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확언하고 악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이성적이고 시민적인 토론과 논쟁이 무너진다. 사람들은 거짓말, 속임수, 검열, 조작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의제와 목적을 추구한다. 간단히 말해, 객관적 진리에 대한 헌신이 없다면 인간 문명은 붕괴한다.

 

진리를 버린 사회는 부족주의와 혼란, 폭정이 지배하는 어둡고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로 전락할 것이다. 조지 오웰은 그의 섬뜩한 소설 《1984》에서 이것을 예견했다. 이야기의 절정은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당(The Party)”의 대표자인 오브라이언에게 심문당하는 장면이다.

“오직 훈련된 정신만이 현실을 볼 수 있다, 윈스턴. 너는 현실이 객관적이며 외부에 존재하고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또한 현실의 본질이 자명하다고 믿는다. 네가 무언가를 본다고 생각할 때 다른 사람들도 너와 같은 것을 본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건대, 윈스턴, 현실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은 인간의 정신 속에만 존재한다. 개인의 정신 속이 아니라―개인의 정신은 실수할 수 있고 결국 사라지기 때문이다―집단적이며 불멸하는 당의 정신 속에만 존재한다. 당이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곧 진리다. 당의 눈을 통하지 않고서는 현실을 볼 수 없다. 그것이 네가 다시 배워야 할 사실이다, 윈스턴.”

 

오웰은 정확히 옳았다. 만일 우리가 궁극적 실재―창조의 하나님―를 버린다면, 현실은 “당” 즉 권력을 쥔 집단에 의해 인간적 차원에서 정의될 것이다. 선택지는 그것뿐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작은 신이나 여신이 되어 각자 현실을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작동 불가능하며 살아낼 수도 없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고, 결국 “당”이 질서를 회복하고 모두를 위한 현실을 규정하기 위해 개입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이런 운명을 피할 희망이 있을까?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당 부분 교회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을 이렇게 위로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진리의 영이라…

그가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요한복음 14:16–17, 16:13).

 

진리의 영으로 충만케 되고 능력을 받은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도록 부름받았다(에베소서 4:15). 우리는 진리의 대사가 되어 사탄이 파괴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거짓과 속임수에 맞서야 한다.

우리의 태도는 온유함과 존중으로 특징지어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악을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디모데후서 2:24–26).

 

궁극적 실재는 존재하며, 그 이름은 예수님이시다! 구원은 다른 어떤 이름에도 없다(사도행전 4:12).

그러나 우리는 그 외의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진리를 말해야 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생명의 거룩함, 사랑과 정의와 자유에 대해 말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의 번영으로 이끄는 정의롭고 인간적인 문화를 세움으로써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런 문화는 객관적 진리의 견고한 기초 위에서만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버린다면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은 바로 “소금과 빛”(마태복음 5:13–14) 되는 삶의 본질이다.

 

우리는 우리 역시 사회적 존재로서 주변 문화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큰 겸손 가운데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 문화의 기본 가정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안타깝게도 교회는 너무 자주 포스트모던 이데올로기를 성경적으로 비판하기보다 그것에 적응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 문화를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마음”(고린도전서 2:16)으로 생각하도록 부름받았다. 우리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고린도후서 10:5)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로마서 12:2) 한다. 요컨대 우리는 주변 문화가 받아들이는 규범과 태도와 행동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제시된 현실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화적 눈가리개를 벗기시고 진리를 드러내시기를 기도하자. 성령께서 참으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면서 말이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거짓된 문화적 가정들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볼 때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문자적으로 “생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거짓에서 진리로,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서는 것이다. 그런 회개는 당신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1960년대 젊은 시절, 대로우 밀러(Darrow Miller)는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고 결국 스위스의 라브리(L’Abri), 곧 프랜시스 쉐퍼와 에디트 쉐퍼의 집에 이르게 되었다. 대로우는 수년 동안 라브리에서 사역했으며, 그 기간 동안 우도 미델만을 만났다. 두 사람은 종종 밤늦게까지 인생의 큰 질문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곤 했다.

어느 겨울밤, 밖에는 눈이 조용히 내리고 촛불의 따뜻한 빛이 방 안을 비추고 있을 때, 우도가 대로우에게 말했다.

“당신이 믿지 않아도 기독교는 진리입니다.”

며칠 밤을 잠 못 이루며 고민한 끝에, 대로우는 우도의 말이 “아무도 믿지 않아도 기독교는 진리다”라는 뜻임을 깨달았다. 이 단순한 생각은 그의 마음을 깊이 흔들어 놓았다. 그는 언제나(그렇게 배워 왔기 때문에) 자신이 믿기 때문에 기독교가 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누구의 믿음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대로우는 회개했다. 그리고 그의 삶의 방향은 영원히 바뀌었다.

대로우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기독교가 객관적으로 참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른다. 오늘날에도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조차 자신의 신앙을 개인적이고 사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경우가 흔하다. 기독교는 “내가 믿는 것” 혹은 “나에게는 진리인 것” 정도로 여겨진다. 그러나 대로우가 스위스에서 그 밤 깨달았듯이, 기독교는 사적인 믿음이 아니라 공적 실재이다. 그것은 “나의 진리”나 “당신의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진리(the Truth)이다.

 

영국의 위대한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복음을 단지 개인적 결단으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삶에 대해 참된 것으로 인정받아야 할 공적 진리로 선포해야 한다.”

이 일은 우리가 진리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야고보는 말했듯이.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 (야고보서 1:6)

 

성경적 세계관의 비교할 수 없는 능력과 아름다움을 이해할수록 우리의 확신이 자라난다. 낸시 피어시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는 어떤 다른 세계관이나 종교보다 더 큰 설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일반 계시의 자료를 더 잘 설명하며 인간에 대한 더 인간적이고 자류롭게 하는 관점을 이끈다.”

 

오직 성경적 세계관만이 진리에 대한 포괄적 관점을 제공한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진리, 물리적 진리, 도덕적 진리를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연결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확증할 수 있게 한다. 선을 긍정하고 악을 거부하게 한다. 과학과 이성을 통해 물리 세계 안의 진리를 이해할 기초를 제공한다. 진리를 단지 물질 세계나 정신의 영역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둘 다를 인정한다.

성경적 세계관은 그것이 참이기 때문에 현실에 부합한다. 오직 그것만이 자유롭고 정의롭고 번영하는 사회를 위한 필수적 기초를 제공한다.

 

모두 훌륭하게 들리지만, 이것을 입증할 수 있을까? 그렇다! 우리는 세 가지 질문으로 어떤 세계관이든 진실성을 시험할 수 있다.

  • 그것은 내적으로 일관성이 있는가?
  • 현실과 부합하는가?
  • 실제로 살아낼 수 있는가?

오직 성경적 세계관만이 이 세 가지 시험을 모두 통과한다. 유물론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치명적인 모순으로  스스로 “자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그 부정 자체가 하나의 객관적 진리 주장이다. 그것은 모든 세계관을 권력의 산물이라고 비난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의 포괄적 세계관을 객관적 진리로 제시한다. 유물론의 치명적 모순은 인간이 오직 과학과 이성만으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단지 고도로 진화한 동물에 불과하거나, 더 나쁘게는 기계라면,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근거를 가질 수 없으며, 하물며 “모든 진리”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호킹 같은 강경한 유물론자들은 그런 주장을 한다.

 

대부분의 유물론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사실상 바로 이 치명적 결함의 결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논리의 기초를 갖고 있지 않지만, 이 결함에서 논리적 결론을 끌어낸다. 그들은 유물론적 진리 주장들의 오만함에 도전하는 점에서는 옳지만, 객관적 진리는 전혀 알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지나치게 멀리 나아간다.

 

진리를 굳게 붙들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을 강화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나 어떤 텍스트도 객관적 의미를 갖지 않고 단지 수많은 해석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포스트모던 사상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신중한 연구와 성령의 인도, 그리고 과거와 현재 교회의 존경받는 교사들의 도움을 통해 성경의 진리를 알 수 있다는 확신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객관적 진리를 붙드는 입장 때문에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도록 강요받게 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객관적 진리는 혼란과 망상 속에 있는 이 세상에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선물이다. 진리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이다. 탈진실(post-truth) 문화 속에서 진리와 사랑은 부당하게 분리되어 왔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선택한 성(性)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않으면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는 수없이 듣는다. 객관적 진리를 주장하면 우리는 편협한 “혐오자”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진리를 사랑으로부터 떼어 놓으면 결국 둘 다 잃게 된다.

 

파괴적이고 심지어 치명적인 문화적 거짓들 앞에서 침묵하거나 수동적으로 있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직무 유기는 배교에 가까운 일이다. 채퓰(Chaput)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배교자가 되기 위해 공개적으로 신앙을 버릴 필요조차 없다. “그들의 신앙이 말하라고 요구할 때 침묵하기만 하면 되고, 예수께서 용기를 가지라고 하실 때 비겁해지기만 하면 되며, 진리를 위해 일하고 싸워야 할 때 그것으로부터 ‘물러서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귀 기울여야 할 경고다. 우리의 기준은 언제나 겸손과 온유함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말해야 한다.
“성경적 진리와 지혜는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다.”

진리의 대사로서 우리의 사명은 가장 기본적인 수준, 곧 개인적인 정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진실하게 말하는 데 조심하는가? 거짓말하거나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가? 손해가 따르더라도 약속을 지키는가? 계약과 맹세를 지키는가? 우리 모두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 영역에서 성장해야 한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고 정직하며 믿을 만한 사람으로 알려진다면, 우리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결국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견고하고 흔들림 없으시며, 우리는 그분을 본받아야 한다. 정직이 신뢰를 낳고, 신뢰가 관계와 사회를 묶는 접착제라는 단순하지만 깊은 진리를 기억하자. 세상이 분열되고 파편화될 때, 우리는 배우자와 친구와 직장 동료와 이웃과 고객들과의 관계를 정직한 삶으로 강화함으로써 이에 맞설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탈진실(post0truth) 시대의 핵심 전제들에 맞서는 창의적인 방법들을 찾아냄으로써 진리의 대사 역할을 감당한다. 뉴비긴은 옳게도 이렇게 말했다.
“교회가 전하도록 보냄 받은 이야기를 전하는 일에 진지하게 헌신한다는 것은 공적 삶을 지배하는 전제들을 근본적으로 질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이러한 “지배적 전제들”은 유물론적이며 포스트모던적이다.

그것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쉽지 않다. 만일 우리가 문화의 문지기들과 권력자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환영받지 못하는 진리를 위해 서는 데에는 용기와 오해받고 심지어 미움받을 각오가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의 생계와 경력, 혹은 그보다 더 큰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는 confrontation(맞섬, 대면)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맞섬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섬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러한 사랑의 맞섬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의 소망을 나눌 때 언제나 “온유와 두려움(존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벧전 3:15).

우리는 이성과 논리,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시민적인 토론과 논쟁의 선함을 확증해야 한다. 우리의 탈진실 문화는 이런 모든 것들을 약화시키는 한편, 감정과 권력 전술—수치 주기, 침묵시키기, 검열, 위협—을 높여 왔다. 물론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이다. 그러나 기관차를 끄는 것은 이성이어야 한다. 모든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표현의 자유와 자유롭고 개방된 탐구, 시민적 토론의 가장 목소리 큰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가톨릭 경제학자 마이클 노박(Michael Novak)은 이렇게 말했다.

“진리가 절대적 명령으로 소중히 여겨질 때에만 문명이 가능해진다. 그때에만 인간은 서로 이성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왜냐하면 문명은 대화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야만인은 괴롭히지만, 문명인은 설득한다.”

이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실망과 오해와 좌절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냉소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거짓과 속임수와 왜곡된 내러티브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탈진실 문화는 이것이 전부라고 말하겠지만, 우리는 결코 진리가 존재한다는 확신을 잃어서는 안 되며, 그 진리를 찾도록 부름받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따르는 무리가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 진리를 찾는 사람은 질문을 환영하고, 대화를 장려하며, 열린 마음을 유지한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에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언제나 부분적이고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우리는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이것이 바로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눅 10:27)는 뜻이다.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나?”라며 냉소적으로 손을 들어 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 어떤 사안의 진실을 밝혀내는 일은 어려울 수 있다. 특히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 어떤 경우에는 수년 동안 탐구하고 조사하며 듣고 토론하고 논쟁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일이다.

 

이러한 확신에 찬 진리 탐구는 그리스도인 언론인들과 역사학자들, 과학자들, 그리고 모든 분야의 학자들의 확고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원하는 관점이나 결과를 지지하기 위해 사실과 증거를 선택적으로 취하고, 맞지 않는 것은 무시하는 왜곡된 내러티브를 만들고 판매하며 확산시키는 탈진실적 관행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증거가 어디로 이끄는지에 상관없이 진리와 사실을 추구해야 한다. 결국 J. I. 패커는 이렇게 말했다.

“복음주의자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든 사실이 하나님의 사실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생각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이며, 바른 이성은 건전한 믿음을 위험하게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부름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신 하나님에 대한 강건한 믿음을 표현하는 확신 있는 지성주의는 역사적 복음주의 전통의 일부다. 만일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이것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원리와 유산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세대 가운데 진리의 빛을 계속 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대가는 날마다 더 커지고 있다. 객관적인 선과 악을 거부한 탈진실 문화는 이제 반대 의견을 짓밟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새로운 전체주의 정신을 낳았다. 진리를 위해 서기 위해서는 진정한 용기와 확신이 필요할 것이다. 소련의 위대한 반체제 인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이 보여 주었던 바로 그런 확신 말이다. 그의 신조를 우리도 우리의 것으로 삼자.

“평범하지만 용감한 사람이 해야 할 단순한 행동은 거짓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며, 거짓된 행동을 지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세상에 들어오고 심지어 지배하게 될지라도, 적어도 나를 통해서는 그렇게 되지 않게 하라.”

 

또한 우리는 또 다른 유명한 소련 반체제 인사인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 체코의 극작가이자 전 총리에게서도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그는 “거짓 속에 사는 것”과 “진리 안에 사는 것”을 대조했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포스터를 붙이는 한 채소가게 주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상인은 가장 저항이 적은 길을 택한다. 그러나 당이 권력을 유지하고 통제력을 행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만을 암묵적으로 지지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인간성 일부를 타협하게 된다. 그는 “거짓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채소가게 주인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난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이익을 위해 그런 구호를 붙이지 않는다. 조작된 선거에 투표하는 것도 그만둔다. 정치 모임에서 자신이 진짜 생각하는 바를 말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양심이 지지하라고 명하는 사람들과 연대할 용기도 발견한다. 이 반란 속에서 그는 거짓 속에 사는 삶에서 벗어난다. 그는 의례를 거부하고 게임의 규칙을 깨뜨린다. 그는 억눌렸던 자신의 정체성과 존엄을 다시 발견한다. 그는 자유에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의 반란은 진리 안에 살고자 하는 시도다.

하벨은 이렇게 말한다.
“이 단순하지만 용기 있는 저항의 행동 속에서, 그 채소가게 주인은 세상을 향해 말한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장막 뒤를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진리 안에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진리 안에 살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빛은 점점 더 어두워지는 세상 속에서 밝게 빛날 것이며, 당신은 세상의 부패를 늦추는 소금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예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기에 결국 “진리가 드러날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구주를 바라본다. 마귀의 거짓이 잠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진리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 영원히.

 

“진리의 한 마디는 온 세상을 능가한다.”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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