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서의 사랑의 질서 (THE ORDER OF LOVE IN HUMAN RELATIONSHIPS)
사랑은 결혼, 가정, 교회, 직장, 공동체 안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인격적인 관계와 직접적인 교류를 포함한다. 상대가 멀어질수록 우리는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든다. 오늘날 인터넷 기술을 통해 우리는 사실상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사람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이 아무리 놀랍다 해도, 사랑이 요구하는 전인격적 만남을 대신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그 지혜 가운데 인간의 한계를 아신다. 주님은 우리가 지구상의 80억 명을 똑같이 사랑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 위대한 러시아 소설가 Fyodor Dostoevsky는 이렇게 말했다.
“인류를 일반적으로 사랑할수록, 개별 인간은 덜 사랑하게 된다.”
다시 말해, 세상 전체에 지나치게 몰두할수록 매일 곁에 있는 실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줄어든다.
성경은 인간관계 안에 사랑의 우선순위를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결혼한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관계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관계는 배우자와의 관계이다(에베소서 5:22, 25). 그다음은 자녀와의 관계(디모데전서 3:4-5), 그리고 부모(신명기 5:16)와 다른 가족 구성원들(디모데전서 5:8)에 대한 사랑이다.
그 다음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나누는 사랑, 특히 지역교회 안에서 정기적으로 교제하는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다(갈라디아서 5:13-14). 마지막으로 친구, 이웃, 외국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심지어 원수들까지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뒤따른다.
인간관계가 바르게 정돈되고 사랑이 올바른 우선순위를 가질 때 관계는 건강하게 성장한다.
사랑과 자유, 정의, 진리의 관계
우리는 지금까지 사랑의 깊이와 풍성함을 조금만 살펴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대중적인 사랑의 이해와 대비하여 반드시 덧붙여야 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사랑과 세 가지 중요한 가치, 곧 자유, 정의, 진리의 관계이다.
사랑과 자유 (Love and Freedom)
자유는 사랑의 단순한 구성 요소가 아니라 사랑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사랑은 그 본성상 자유롭게 선택되어야 한다. 사랑은 강요되거나 프로그램되거나 억압될 수 없다. 선택의 요소가 사라지면 사랑은 그 본질을 잃는다.
하나님의 본성의 중심에는 사랑과 자유가 있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분이시기에 그분의 뜻에 반하여 무엇인가를 강요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선택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특별히 사랑받을 만하거나 가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신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노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신명기 7:7-8)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기초하며, 언약이라는 충성의 약속으로 확증된다. 이것이 언약, 신실함과 인내하는 사랑의 성경적 개념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로봇이나 기계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관계 맺도록 자유롭게 만드셨다. 누군가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강요할 수는 있어도 사랑만큼은 강요할 수 없다. 자유롭게 주어지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과 같이 우리도 약속, 언약, 충성으로 우리의 사랑을 확증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적 사랑의 기초는 자유로운 선택과 신실한 헌신이다.
사랑과 정의 (Love and Justice)
사랑과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관계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
앞서 우리는 출애굽기 34:5-7에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선포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본질적인 성품을 나타내며,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은 긍휼, 자비, 은혜, 그리고 용서로 표현된다.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다. 그러나 정의 또한 하나님의 성품의 핵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 있는 자를 결코 벌하지 않은 채 두지 아니하시며, 아버지의 죄를 자손 삼사 대까지 갚으신다.”
정의에는 진노와 심판과 형벌이 포함되기 때문에 사랑과 정의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랑은 정의를 필요로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안타깝게도 악과 불의는 타락한 세상에서 너무나 익숙한 현실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지만, 그들이 행하는 악과 불의를 미워하신다. 또한 하나님의 완전한 도덕적 거룩함 때문에 그것을 못 본 척하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로 넘기실 수 없다.
불의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수 없는 것이다. 불의는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며, 그분을 행동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불의의 피해자들을 변호하시고 그들의 사정을 돌보신다(시편 140:12). 또한 모든 악한 행위를 심판하시고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실 것이다(전도서 12:14).
남편, 부모, 장로, 교사, 또는 국가의 지도자와 같은 권위 있는 위치에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우리의 보호와 돌봄 아래 있는 사람에게 해를 가할 때 우리는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사랑에 실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남편이자 아버지인데 누군가가 집에 침입하여 아내와 자녀들을 해치려 한다고 가정해 보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공격자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수동적으로 서 있으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고 보호해야 할 신성한 책임을 저버리는 일이다. 또한 그것은 공격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다. 왜냐하면 그의 악한 행동을 아무런 제약 없이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며, 그것을 방치하면 결국 그 자신의 파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죄인이 자신의 죄악된 길을 아무런 결과 없이 계속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결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정의를 버리거나,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을 용인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어떻게 정의와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 대라”(마태복음 5:38-48)는 명령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우리는 잘못을 그냥 넘기고 빨리 용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구분을 해야 한다. 그 불의가 나 개인에게 행해진 것인가, 아니면 나의 권위와 보호 아래 있는 사람에게 행해진 것인가?
만약 내가 피해자라면,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왼뺨도 돌려 대고”, “겉옷도 내어주는” 자세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주교가 강도를 당했을 때 은식기까지 내어주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에게 행해진 잘못에 대해 정의를 구하는 것이 항상 금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올바른 대응을 위해서는 신중한 분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코 복수심으로 행동하거나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된다.
앤서니 에스테베스(Anthony Esteves)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말했다. “복수심과 앙갚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설 자리가 없다.”
대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완전한 때에 모든 잘못을 바로잡으실 것을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보호와 돌봄 아래 있는 사람들이 불의를 당할 때에는 정의를 추구할 신성한 책임이 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불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성경은 또한 사랑과 징계와 형벌의 관계를 자주 이야기한다. 우리의 타락한 죄성은 온갖 종류의 악행을 낳고, 결국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 권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잘못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징계와 처벌을 통해 그것을 바로잡으려 함으로써 사랑을 나타내야한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히브리서 12:6)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요,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언 13:24)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드러났다.
정의는 죄와 인간의 악이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일으켰기 때문에 필요했다.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 악에 대한 형벌과 대가가 반드시 치러져야 했다.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친히 담당하시고,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다는 사실에서 나타났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서로 충돌하는 곳이 아니라, 완벽하게 만나는 곳이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셨고, 정의 때문에 죄는 반드시 심판받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는 가장 완전하게 조화를 이룬다.
진리와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린도전서 13:6).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탈진실(post-truth)” 시대에는 사랑이 진리로부터 충격적일 만큼 분리되고 있으며, 이는 타락한 세상뿐 아니라 점점 더 교회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죄된 선택이나 스스로 선택한 성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진실을 말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힌 편협한 “혐오자(hater)”라는 낙인이 찍힌다.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의 많은 사람들은 친절함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친절한 것은 사랑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이러한 “친절함”은 거짓되고 파괴적인 문화적 흐름과 신념들, 특히 영향력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장하는 잘못된 것들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자신들을 좋게 생각하고, 그 결과 복음에도 더 마음을 열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진리와 사랑을 분리하면 결국 둘 다 잃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부름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진실을 말하도록도 부름받았다. 켈리 먼로 컬버그(Kelly Monroe Kullberg)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적 진리와 지혜는 인간을 향한 가장 높은 사랑이다.”
파괴적이며 심지어 생명을 위협하는 문화적 거짓말 앞에서 침묵하거나 수동적으로 있는 것은 이웃 사랑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적 책임의 방기는 배교에 가까운 일이다.
가톨릭 대주교 찰스 샤퓌(Charles Chaput)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배교자가 되기 위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부인할 필요가 없다. 단지 믿음이 말하라고 요구할 때 침묵하면 된다. 예수께서 용기를 요구하실 때 비겁해지면 된다. 진리를 위해 일하고 싸워야 할 때 진리로부터 ‘물러서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한다(에베소서 4:15). 겸손과 온유함으로 말해야 하지만, 반드시 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긍휼은 진리에 대한 분별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모두가 실제로 궁핍한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무조건 자선을 베푸는 것이 오히려 해로운 행동을 조장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만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데살로니가후서 3:10-12). 어떤 경우에는 가족들이 돌봐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디모데전서 5:4, 8). 또 어떤 사람들은 중독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단순히 물질적 도움을 주는 것이 오히려 그들의 중독을 강화할 수 있다. 그것이 사랑처럼 느껴질 수는 있지만 결코 진정한 사랑은 아니다.
진정한 긍휼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처럼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진정한 필요가 나타날 때 그리스도인은 행동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이 가져오는 긍정적인 문화적 결과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독특하다. 어떤 종교나 이념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찾기 어렵다. 역사상 이보다 더 급진적이고 혁명적이며 변혁적인 가르침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랑이 전혀 없는 두 사람의 관계를 상상해 보라. 상대방의 복지에 대한 관심도 없고, 은혜나 자비나 용서도 없다면 그 관계는 화해의 가능성이 없는 쓰라린 갈등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것을 가족, 공동체, 사회, 국가 전체로 확대해 보라.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사랑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그곳은 끝없는 증오와 갈등과 폭력이 가득한 살아 있는 지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뻐할 수 있다. 사랑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해 온 하나님의 성품의 본질이다. 우리가 자격이 없음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사랑을 베푸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다. 새 피조물이 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능력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와 가정,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도구가 된다.
사랑과 그에 수반되는 자비, 은혜, 긍휼, 용서, 기쁨, 희생적 섬김은 인간관계를 견고하게 붙들어 주는 접착제와 같다. 우리가 사랑을 깊이 이해하고 실제로 살아낼 때, 사랑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결국 세상을 변화시킨다.
가장 강력한 힘은 가장 깊은 차원의 사랑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사랑이며, 그 대상이 원수일 때는 더욱 그렇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전염병으로 고통받던 로마 제국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했을 때, 그 사랑의 능력은 몇 세대 안에 로마 세계를 기독교 제국으로 변화시켰다.
그 동일한 능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탈기독교화된 서구 사회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떠남으로써 사랑에 대한 참된 지식과 실천을 잃어가고 있다. 그 결과 불신, 갈등, 부족주의, 불안, 우울증이 증가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을 향한 사명의 중심에 진정한 사랑을 보여 줄 특별한 기회를 가지고 있다. 그 사랑은 점점 깊어지는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며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주류 문화와 심지어 많은 교회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대체한 거짓되고 위조된 사랑을 분별하고 거부해야 한다.
재정의된 사랑 (Redefined Love)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에 뿌리를 둔 깊고 풍성하며 다면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너무나 깊어서 바닥이 없다. 평생을 연구해도 그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개인이나 사회, 문화가 하나님을 버리면 사랑은 어떻게 되는가?
사랑은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인 것이 된다. 깊이와 풍성함과 능력을 잃는다. 본질적인 요소들이 제거되면 더 이상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파괴적인 위조품이 된다.
사랑의 일반적 정의
즐거움, 기쁨 또는 만족의 원천.
강한 애정. 종종 낭만적 감정과 성적 매력을 동반함.
비극적이게도, 이것이 바로 탈기독교(post-Christian), 탈진실(post-truth) 시대의 서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서구 사회는 사랑을 개인적인 애정과 성적 욕망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LoveWins 와 #LoveIsLove 라는 널리 퍼진 해시태그를 생각해 보라.
세계 최대의 LGBTQ+ 옹호 단체인 인권 캠페인(Human Rights Campaign, HRC)은 이 해시태그들을 2015년에 만들어, 이른바 “동성결혼(same-sex marriage)”을 홍보하기 위한 대규모 홍보 캠페인의 일부로 사용하였다.
「HRC의 #LoveWins 해시태그가 퍼지다(HRC's #LoveWins Hashtag Goes Viral)」라는 제목의 한 기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LoveWins 해시태그는 2015년 6월 연방대법원의 결혼 평등(marriage equality) 판결을 둘러싼 핵심 메시지였다. HRC는 수많은 일반 시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와 참여를 받았으며, 테일러 스위프트 같은 유명 인사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같은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Ben & Jerry's와 같은 기업들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수백만 명의 팔로워들에게 결혼 평등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LoveWins는 그날 하루 종일 수많은 언론 매체에서 언급되었다. 지역 신문의 1면이든 전국지든, 저녁 뉴스든, 트위터나 페이스북 피드든, 사람들이 어디를 보든지 #LoveWins가 등장했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LoveWins는 단지 결혼 평등의 승리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역사에 기록될 한 날의 엄청난 흥분과 기쁨의 감정을 상징했다.”
인권 캠페인(HRC)이 자신들의 운동을 홍보하는 중심 개념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사람들은 사랑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영향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낭만적 애정과 성적 매력에서 비롯되는 강렬한 감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 이해는 당시 서구 사전들에 등장한 결혼의 재정의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결혼은 함께 살아가며 성적·가정적 동반자가 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성인들 사이의 법적으로 인정된 낭만적 돌봄 관계이다."
핵심적으로 말하면 HRC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사랑이 승리한다(#LoveWins)”는 이유로 동성 커플은 결혼할 법적 권리가 있으며, 여기서 사랑은 두 성인 사이의 낭만적 애정에 기초한 성적 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2015년 이후 이러한 정의 속에 있는 “두 명의 동의한 성인(two consenting adults)”이라는 요소도 도전을 받게 되었다. 어떤 집단들은 다자간 연애(polyamory), 즉 세 명 이상이 동의하는 관계의 정상화를 주장하고 있으며, 심지어 왜 “성인”이어야 하는지 자체를 문제 삼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나면, 결혼이나 사랑 같은 단어들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이익집단이 원하는 대로 재정의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정의를 사회 전체에 강요할 수 있다.
사랑이 주관적으로 정의될 때, “사랑”이라는 단어는 어떤 형태의 성적 욕망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죄된 선택과 행동을 인정하도록 요구한다. 그것이 아무리 악하거나 파괴적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축소되고 왜곡된 사랑에서 사라진 것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 진리가 사라졌다
진정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린도전서 13:6).
그러나 위조된 사랑은 진리를 거부한다. 여기에는 성(sex)과 결혼(marriage)에 관한 진리도 포함된다.
성적 친밀함은 분명 사랑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남편과 아내,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결혼 안에서만 그러하다.
• 신실함(Fidelity)이 사라졌다
언약적 신실함(covenant faithfulness) 역시 사라졌다.
위조된 사랑의 개념에 기초한 새로운 결혼 정의는 이 중요한 요소를 완전히 제거해 버린다.
사실 이러한 신실함의 상실은 동성결혼 운동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서구 사회의 사랑 이해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1969년 캘리포니아주가 처음으로 무과실 이혼(no-fault divorce)을 합법화했고, 2010년에는 모든 주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사랑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언약적 헌신이 아니라, 단지 강렬한 낭만적 감정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비극적으로도 이러한 감정 중심의 거짓된 사랑은 세상 만큼이나 교회 안에도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그 결과 이혼율도 거의 동일한 수준에 이르렀다. 기독교인 남성과 여성들은 종종 이혼을 결정한 이유를 설명하며 “더 이상 그(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이는 관계 속에서 예전과 같은 로맨스나 감정적 설렘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가짜 사랑은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랑의 질서 또한 거부하며 사랑을 파괴적인 우상숭배로 왜곡한다. 돈, 쾌락, 권력, 명예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삶의 최우선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무질서한 사랑은 추하고 자기애적이며 감정에 지배되고 쾌락주의적인 위조품이다. 그것은 행복을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불법적인 성관계, 돈, 권력, 명예도 인간의 가장 깊은 필요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이러한 거짓 신들을 우상으로 섬기면 결국 사람은 공허하고 상처 입으며 마침내 파멸에 이르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8상)
반면 참된 사랑은 풍성한 생명(요한복음 10:10), 영생(갈라디아서 6:8하), 그리고 충만한 기쁨(요한복음 15:11)을 약속한다. 이러한 기쁨은 하나님을 무엇보다 사랑할 때, 그리고 역설적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자신의 필요보다 앞세울 때에만 찾아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태복음 16:24–26)
마지막으로, 사랑의 가장 심오한 측면인 아가페(agape), 곧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희생적 섬김도 사라졌다. 아가페가 제거되면 그에 따르는 은혜, 자비, 긍휼, 용서도 함께 사라진다.
아가페가 철저히 타인 중심적이라면, 거짓 사랑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아가페가 감정과 상관없이 선택에 기초한다면, 거짓 사랑은 전적으로 감정과 정서에 기초한다.
하나님을 버림으로써 어둠은 서구 세계 위에 내려앉고 있다. 자기중심적 자기애와 가짜 사랑의 타락은 그 결과 중 하나이다. 또 다른 결과는 무신론적 이념들의 재등장이다. 예를 들어 최근 형태의 마르크스주의,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또는 “비판 이론(critical theories)” 등이 그러한데, 이것들은 이제 탈기독교(post-Christian) 서구의 제도들을 형성하는 지배적 세계관이 되었다. 오늘날 대학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라.
진정한 사랑은 쉽게 용서하고 “잘못을 기억하지 않지만”, 이러한 해로운 이념은 진리를 권력으로 대체하고 감사함을 원망으로 대체한다. 이런 문화 속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물론이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은혜도 없고, 용서도 없으며, 자비도 없다. 오직 권력과 지배를 향한 끝없는 투쟁만 있을 뿐이다. 만일 기독교를 서구 문명의 중심에서 몰아내려는 이러한 흐름이 제어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이 운명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에 참사랑의 “더욱 탁월한 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정과 직장, 이웃과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기초로 한 문화를 다시 세워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그것이 거짓 사랑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매일의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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