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관점을 다시 생각하기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결혼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일을 소홀히 해 왔다. 우리는 결혼의 의미를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의 결혼관은 부모, 친구, 교사, 미디어, 문화로부터 무비판적으로 흡수한 가정들에 기초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왜 결혼해야 하지?”라고 묻는다. 아마도 그들은 깨어진 가정에서 자랐거나, 주변 친구들의 이혼을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함께 살면 되지 왜 굳이 결혼해서, 나중에 헤어질 때 결혼식 비용과 법적 문제까지 감수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이 나올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적절한 답을 하지 못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왜 결혼해야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안타까운 사실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조차 결혼과 성, 피임, 자녀에 대해 성경보다 세상문화에 더 가까운 방식으로 생각해 왔다는 것이다. T. M. 무어의 말은 옳다. 이제 우리의 초점은 “우리가 어디서부터 주님의 뜻과 목적에서 벗어났는가”에 맞추어져야 한다. 이 문화적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선 정치적 변화가 아니라 회개이며, 그것이 부흥과 새로움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우리는 결혼이 본질적으로 로맨스와 동반자 관계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곧 다른 사람과의 깊고 친밀한 관계 말이다. 이런 결혼의 이미지는 어릴 때부터 음악과 영화, 소설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새겨졌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운명의 짝”을 만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산다”는 이야기 말이다. 물론 로맨스와 동반자 관계는 건강한 결혼의 일부다. 문제는 그것이 결혼의 전부가 될 때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결혼은 단지 부부의 낭만적 감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정을 세우는 것이다. 결혼을 단지 낭만적 관계에 대한 일시적 법적 인정 정도로 여기는 생각은 일부 동성애 운동가들의 소수 의견이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문화 속에서 지배적인 관점이었다. 본질적으로 교회도 자신도 모르게 이런 축소된 결혼관을 받아들여 왔다. 이것은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성애자들이 요구하는 “결혼 평등”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 “낭만적 동반자” 접근은 덧없는 감정에 의존한다. 강렬한 감정이 사라질 때는 어떻게 되는가? 언젠가 반드시 그렇게 된다. 더 이상 배우자를 사랑한다고 “느껴지지” 않고, 또 무과실 이혼이 가능하다면, 사회 전체보다는 낮다 해도 교회 안의 이혼율이 여전히 지나치게 높은 것도 이상하지 않다. 결국 낭만적 동반자 중심의 결혼관은 우리의 이기심을 부추긴다. 그것은 내 낭만과 사귐의 욕구가 충족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결혼은 내 감정적 필요를 위한 것이 아니다.
토드 윌슨은 말한다.
“성경은 결혼에 대해 훨씬 더 풍성하고, 깊고, 견고한 이해를 제시한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감정 이상의 것이다.”
결혼은 마음과 생각과 영혼과 몸의 연합이다. 그것은 단지 부부의 행복이나 감정적 만족만이 아니라 자녀와 가족,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이다. 결혼은 단지 “사랑에 빠진 느낌”이 아니라 감정의 오르내림과 상관없이 평생의 언약에 충실한 것이다. 그 언약은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렇게 더 풍성한 결혼의 의미는 교회에서 거의 가르쳐지지 않는다. 맥도웰과 스톤스트리트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 전역의 교회들이 ‘행복한 결혼’, ‘성취감 있는 결혼’, ‘의미 있는 결혼’을 위한 세미나와 설교는 많이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와 설계에 따른 결혼을 제자훈련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낭만적 동반자 중심의 결혼관만이 교회가 세상에 의해 훈련받은 유일한 영역은 아니다. 개인의 자율성, 선택, 물질주의라는 사회적 가치들도 교회의 결혼관을 크게 형성해 왔다. 배타적 언약 관계라는 개념은 “주권적 자아”를 높이는 사회의 흐름에 거슬린다. 결혼은 개인의 자유를 잃는 것, 곧 “족쇄”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좋은 삶이 흥미진진한 모험과 물질적 풍요로 가득한 삶이라고 배운다. 자녀는 자유를 제한하고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그런 목표를 방해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런 태도 때문에 젊은이들은 직장에 자리 잡고 원하는 생활 수준을 유지할 만큼 충분한 재정을 마련할 때까지 결혼을 미루게 된다. 여기에 손쉽고 저렴한 피임, 확대되는 훅업 문화, 만연한 음란물이 더해지니, 서구 사회에서 피임과 낙태가 거의 신성한 성례처럼 여겨지는 것도 놀랍지 않다.
슬프게도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도 흔히 전달되는 메시지는 성은 주로 쾌락을 위한 것이고, 결혼은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스톤스트리트는 이렇게 말한다.
“성, 결혼, 자녀 사이의 불가분의 연결은 기독교 안에서 가장 무시되고 있지만 동시에 가장 명백한 성경적 원리일 수 있다. 특히 젊은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할 때, 성과 결혼의 연결은 인정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성과 결혼과 자녀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의 패키지라는 생각은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다.”
왜 이것이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인가? 상당 부분은 피임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 때문이다. 성경을 믿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수십 년을 지냈지만, 나는 피임에 관한 설교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결혼 전 상담에서도 자녀 수와 시기에 대해 배우자와 합의하라는 정도 외에는 다뤄지지 않았다.
문화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아이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뒤에야 가져야 한다고 당연하게 믿는다. 그리고 대부분 두 명, 많아야 세 명 정도를 최대치로 생각한다. 세 명 이상의 자녀를 둔 부부는 소수다. 신혼 직후 아이가 생기면 사람들은 농담처럼 “애가 어디서 오는지 아무도 안 가르쳐 줬나?”라고 말한다. 피임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그리스도인 부부는 급진적이고 극단적으로 여겨진다. 결국 젊은이들이 결혼하는 나이나 자녀 수에 있어서 교회와 세상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맥도웰과 스톤스트리트는 이에 대해 경고한다.
“많은 개신교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피임약은 결혼 제도에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혼이 단지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파괴적인 생각을 강화시켰다. 또한 결혼의 한 기능인 출산이 왜 남자와 여자라는 구조를 필요로 하는지를 흐리게 만든다.”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결혼과 성, 그리고 출산 사이의 본질적인 연결을 이해하도록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결혼은 경건한 자녀를 양육하기 위한 필수적인 환경이라는 점을 보게 해야 한다. 특별히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열방을 복 주시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피임에 대해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의심 없이 문화적 선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이 만들어지고 발전된 역사와, 그 열매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가족 규모를 제한해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비용이나 불편함에 대한 두려움이 마지막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큼 자녀를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을 느낀다. 대부분은 한 아이만 키우는 것도 벅차다고 느끼며, 다섯이나 여섯은 상상조차 어렵다. 사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런 두려움이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결혼의 위대한 점 중 하나다. 결혼 전체는 믿음을 훈련하는 과정이다.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위해 필요한 은혜와 힘과 자원을 공급하실 준비가 되어 계신다. 나의 이전 목사였던 톰 가라샤는 이렇게 말했다.
“건강한 것은 성장한다. 성장하는 것은 변한다. 변화에는 위험이 따른다. 위험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믿음은 사람을 건강하게 만든다.”
결혼의 붕괴는 되돌릴 수 있다. 그러나 그 회복은 먼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스톤스트리트와 맥도웰은 말한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설계로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돌아가는 부흥 없이 건강한 결혼 문화를 세울 길은 없다.”
궁극적으로 결혼의 해체는 성혁명가나 LGBTQ 활동가들만의 작품이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 사탄의 전략이다. 그가 결혼과 가정을 약화시키고 파괴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열방을 복 주시려는 계획도 크게 방해받게 된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이 회복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지금 교회에 가장 절실한 필요는 결혼의 참된 의미를 다시 발견하고, 문화의 거짓 가치와 관행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지역사회와 세상 전체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결혼의 깃발을 세우는 일은 오늘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자 목회자,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차 대각성 운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고, 수많은 책과 설교를 남겼으며, 수많은 선교사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아내 사라와 함께 세운 가정이었다. 그들의 열한 자녀는 미국의 역사와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150년에 걸쳐 그들의 후손 가운데는 백 명이 넘는 해외 선교사, 열세 명의 대학 총장, 예순다섯 명의 대학 교수, 백 명의 변호사, 서른 명의 판사, 예순여섯 명의 의사, 세 명의 연방 상원의원, 세 명의 주지사, 세 명의 대도시 시장, 수많은 금융·상업·산업계 지도자들, 그리고 미국 부통령 한 명이 나왔다.
이런 문화적 영향력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 위에 세워진 결혼의 열매였다. 당신의 결혼과 가정은 어떤 유산을 남길 것인가? 아마도 당신이 평생 하게 될 가장 중요한 일은 가정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영향력은 아주 단순한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뉴욕 킹스칼리지의 전 부총장이었던 킴벌리 손버리와 남편 그렉은 자녀들이 어린 시절부터 믿음을 실천하도록 돕기 위해 몇 가지 가족 의식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친구들과 가족이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를 모아 “기도의 집”을 만드는 것, 첫눈이 오면 아이들에게 작은 선물을 주는 것, 그리고 가족들이 한 해 동안 감사했던 이유를 적어 넣는 “감사 항아리”를 두는 것 등이었다. 이런 작은 실천들은 시간이 지나며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녀는 말한다.
“적은 비용의 가정 의식 몇 가지를 신실하게 실천하는 것이 바쁜 가정의 일상에 놀랄 만큼 큰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매일, 매달, 혹은 계절마다 반복되는 습관과 축적은 개인과 가정을 형성하는 핵심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그림이 되어야 한다(에베소서 5:22–32). 안타깝게도 우리는 너무 자주 그리스도인의 결혼이 무너지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것은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비극일 뿐 아니라, 자기희생적 사랑과 참된 기쁨을 거의 포기해 버린 세상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여 줄 기회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완벽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수십 년의 결혼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와 아내와 함께하셨음을 증언할 수 있다. 쉽지는 않았지만, 우리와 주변 사람들을 위해 충분히 가치 있는 여정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된 우리의 불완전한 결혼조차 믿지 않는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 자신의 결혼과 가정을 넘어, 우리는 공개적으로 결혼의 진리에 대해 담대히 증언해야 한다. 세상에 이렇게 말해야 한다.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이며, 우리는 그것을 마음대로 재정의할 자유가 없다. 아이들은 축복이며, 그들은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양육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한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것이다. 그러나 침묵해서는 안 된다. 워싱턴주의 꽃집 주인 배러널 스투츠먼과 콜로라도의 제빵사 잭 필립스의 사례를 보라. 그들은 동성애 고객들을 친절하게 섬기고 고용하기도 했지만, 동성 결혼을 축하하는 꿏과 케익 요청받았을 때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들은 소송과 벌금, 심지어 생명의 위협 가능성까지 알면서도 굳게 섰다. 그들의 사랑과 용기 있는 태도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종교 자유의 둑을 지켜 냈다.
결혼의 진리를 회복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이미 개인적으로 상처를 입었다. 우리는 이혼 가정의 자녀일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이 이혼했을 수도 있다. 배우자나 자녀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다. 낙태를 경험했을 수도 있고, 부적절한 관계에 얽혀 있을 수도 있다. 점점 더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건강하고 성경적인 결혼의 본을 보지 못한 채 자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깨어짐 속에 우리 자신의 책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기보다(요한복음 15:12),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상처 입혔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에게 말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이해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가 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번째 기회, 세 번째 기회, 심지어 네 번째 기회까지도 은혜로 주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당신은 하나님과, 그리고 당신이 상처 준 사람들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는가? 결혼에 대해 회개해야 할 잘못된 믿음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은 놀랍도록 은혜로우신 분이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기신다(시편 103:12). 그러나 먼저 우리는 겸손히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회개한 후에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우리는 파괴적인 문화의 흐름에 휩쓸려 갈 것인가, 아니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길을 따를 것인가? 나의 기도는 당신이 하나님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처럼 이렇게 결단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15).
우리 모두는 결혼했거나, 앞으로 결혼하게 되거나, 결혼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우리는 결혼의 진리를 알고 의식적으로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 세상의 문화는 결혼의 의미를 제거하고, 심지어 결혼 자체를 없애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존중과 담대함으로 굳게 서야 한다. 결혼은 하나님의 성품과 열방을 향한 선한 목적에 너무나 중요하고 중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결혼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그것은 자동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결혼은 열정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선택하라!
'무너진 세상을 치유하는 10가지 단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5장 자유(Freedom)-2 (0) | 2026.05.24 |
|---|---|
| 5장 자유 (Freedom) - 1 (0) | 2026.05.23 |
| 4장 결혼 -4 (0) | 2026.05.23 |
| 4장 결혼 -3 (0) | 2026.05.22 |
| 4장 결혼 -2 (0) | 2026.05.22 |